본문 바로가기

글 서재/[자작] 블레이드 코드

[블레이드 코드] Act.1-2장 피타고라스 - 9화

 

시티 시큐리티 센터
블로섬 레지던스 지구

 

저벅… 저벅… 저벅…

 

이곳에 낯익은 이방인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안경을 쓰고 딱딱한 인상을 하고 있는 그는 신중하게 주변의 흔적을 살펴봤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한 곳에 멈춰 섰다.

 

‘발자국.’

 

그것은 고운 모래 카펫을 거침없이 헤집어 놓고 있었고 어딘가로 곧장 향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남자는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따라갔다. 상당히 오래 전에 버려진 도시이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가 경계심을 늦추는 일은 결코 없다. 발자국은 건물 안으로 이어지더니 망설임 없이 계단으로 향해 층계를 올라갔다.

 

저벅…

 

남자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발자국이 어느 한 층에서 계단을 벗어나 복도로 이어진 것이다. 그것은 이어서 곧장 어느 방안으로 이어졌다. 방의 입구에는 최근에 문이 바닥의 모래를 거침없이 쓸어낸 흔적 역력했다.

 

‘후우…’

 

남자는 들리지 않게 심호흡을 하고 난 뒤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신나간 짓이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가서 귀를 기울였다.

 

지지직 지직 지지직…

 

방안은 기계의 비명소리만 무성했다. 그는 이번에는 고개를 살짝 내밀어서 안쪽을 살펴봤다. 빛이 거의 들지 않은 어두컴컴한 곳에 다양한 모양의 홀로그램 화면들이 기계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거기에 얼마 전까지 누군가 사용했던 듯 모래와 먼지가 쓸린 책상과 의자, 아무렇게 주변에 떨어져 있는 종이들까지. 분명 무엇인가 자의식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스윽 저벅 저벅

 

안전을 확인한 남자는 방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그때.

 

“아저씨! 들려?!”

“으헉!”

“어… 괜찮아?”

“리…! 후… 리아나?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습니다만.
갑자기 소리치는 것 좀 자제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헤헤, 미안해! 고층 빌딩에 도착했다고 말하려구.”

“그 정도는 메시지로 말해도 됩니다.”

 

피타고라스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방금까지 했던 긴장했던 자신이 괜히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 임무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것은 자신 뿐인가.

 

“딱딱하기는! 서로 알게 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목소리라도 익숙해져야지~!”

“저는 임무 중에 잡담하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습니다.”

“으~ 재미없어.”

“그래서, 도착하셨다고요. 노엘과 올리버는 보입니까?”

“바로 일 이야기부터 하기? 어휴, 누가 일벌레 아니랄까 봐.”

“대답은?”

“음~ 어디로 꽁꽁 숨어버렸나? 안 보여!”

“그렇습니까. 그럼 발견하면 다시 연락하시죠.”

 

피타고라스는 서둘러 통신을 끊으려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리아나가 더 빨랐다.

 

“아, 아~ 벌써 끊으려구?”

“용건은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혼자 있으면 끔찍하게 심심하단 말이야.”

 

피타고라스는 가뜩이나 말하기 좋아하는 그녀이니 퍽이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는 빌딩이 워낙 많으니까 찾으려면 시간 꽤 걸릴 거야.
그러니까 그 동안 이야기나 조금 더 해!
우리 만나자마자 정신없이 임무만해서 이야기도 별로 못했잖아.”

 

실제로도 그랬다. 이들, 환상 즉흥곡 크루는 블레이드 앙상블 베이스 캠프를 나오고 나서 수 개월간 같이 임무를 해왔다. 하지만 대화다운 것을 나눈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피타고라스는 생각했다. 그녀와 가까워지는 것도 임무의 일환이리라. 그리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도 그녀와의 우호적 관계를 쌓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뭐 그러시죠. 대신 전 계속 조사할 테니 대답이 느릴 수도 있습니다.”

“네네~ 그래서 아저씨는 어디에 있어?”

“리아나가 알려줬던 곳에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올리버라는 꼬마가 뛰쳐나왔던 곳? 오~ 빠른데!”

“복잡한 길이 아니었으니까요.”

 

사실 피타고라스는 이 도시가 몰락하기 전에 이곳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흐응~ 그래도 초행자가 가기에 쉬운 길은 아니었을 텐데.”

“제가 괜히 오퍼레이터가 아닙니다.”

 

피타고라스는 리아나가 가벼워 보이지만 의심 혹은 호기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는 계속 주변을 조사하면서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부스럭 부스럭

 

“그런데 리아나는 이 크루에 자원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네~! 환상 즉흥곡 크루의 넘버 투는 바로 이 리아나랍니다!”

 

넘버 투이니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정말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응? 이유?”

“그 실력이라면 훨씬 좋은 다른 크루에 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오~ 그거 칭찬?”

“그렇다고 해두죠.”

 

건성 없이 대답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녀는 붙임성 좋은 성격을 차치해도 사격 실력도 꽤 괜찮았다. 아니, 솔직히 실력이 좋지 않더라도 누구든 이런 크루가 아닌 훨씬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 블레이드 앙상블은 언제나 인력난이니까. 그런데도 그녀는 이곳에 자원했다.

 

“당연히 우리 노엘 때문이지!”

“…그게 이유가 될 수 있습니까?”

“안 될 이유는 또 뭐야?”

“리아나도 블레이드 앙상블에 오래 있었을 테니 알 것 아닙니까.
이런 불안정한 크루는 얼마 못 간다는 것을 말이죠.”

“흐응…”

“가디언이 없는 것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역시 문제는 노엘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크루를 움직이기에는 한참 모자랍니다.”

“어머, 아저씨 돌직구 날리네!”

“사실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노엘이 아직 미숙하긴 하지~!”

“그런데 노엘 때문에 왔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된다는 겁니다.”

 

어느새 피타고라스는 조사도 까맣게 잊은 채 진심으로 리아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마테오에게 크루 명단을 받았을 때부터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던 그녀. 그녀의 진짜 의중은 무엇일까.

 

“그야 이유는 뻔하지. 재미있어 보이니까!”

“재미?”

“응!”

“음… 그렇군요. 재미라…”

 

피타고라스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말문이 막혔다. 재미, 재미라고 했다. 실수가 없어도 어느 날 갑자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이 위험한 세계에서, 고작 재미 때문에 이 불안정한 크루를 지원했다고 했다. 피타고라스는 일단 그녀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는 아저씨는?
1과 0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아저씨는 자원할 사람으로 안 보이는데.”

 

부스럭 툭툭

 

피타고라스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 몇 장을 주우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저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흐응…”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걸 느꼈는지 리아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뾰루퉁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종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그 내용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심각하군요.”

“왜? 무엇인가 발견했어? 재미있는 것은 혼자 보지 말고 말해줘~”

“일기… 아니 낙서입니다. 꽤 오래 전에 쓴 것 같군요.”

“어머, 설마 올리버가 쓴 것?”

“예. 내용이나 정황을 미루어 봤을 때는 그럴 것 같군요.”

“뭐라고 써져 있어? 읽어줘, 빨리 빨리~!”

“무슨 내용을 기대하든 후회할 텐데요.”

“설마 궁금하게 해 놓고 안 알려줄 것은 아니지?”

 

피타고라스는 내키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위해 그녀에게 의심을 살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가 하려는 일은 섬세하게 진행되어야 하니까.

 

“알았습니다. 대신 몇 문장만 읽어드리죠. 어차피 다 비슷한 내용이니까요.”

“야호!”

 

피타고라스는 덤덤히 새까맣게 낙서가 가득한 종이들 중 하나를 읽어 내려갔다.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죽고 싶어.

왜, 왜 살아있지? 왜? 무엇을 위해서? 어째서? 왜 버티고 있지?
내가 제일 먼저 죽으려고 했는데, 포기하려고 했는데.
왜, 왜? 왜?
왜 나만 남았지? 왜? 어째서? 왜?
죽고 싶어. 죽고 싶어. 그런데 죽질 않아. 죽고 싶어도 죽어지질 않아.

누구 없어? 누구… 도와줘, 누가 좀… 누가… 누가

 

“…아저씨, 그만.”

 

조금전까지 밝았던 리아나의 목소리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차분히 종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짧아져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진지해질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후회할 것이라고.”

“아저씨, 나. 이모션 페스트에 감염된 사람은 거의 못 봤는데 보통 이래…?”

“어떤 계통의 이모션 페스트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합니다만.
 예. 대체적으로는 이렇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은 그거야?”

“이모션 페스트 때문이죠.
이모션 비스트가 되기 전까지는 숙주가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니까요.”

“…자신의 죽음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끔찍해.”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는 해도 뭐라고 할까, 이건 너무…’

 

피타고라스는 오퍼레이터이면서 연구자로서 많은 이모션 페스트 감염자를 봤다. 하지만 올리버의 경우는 그가 보기에도 과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굳이 리아나에게 그 말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녀를 위한 배려보다는 그가 하려는 일에 그녀가 방해가 될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이모션 페스트 감염자에게는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경우입니다.
중요한 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응…”

“저는 조사를 계속하겠습니다.
리아나는 기분전환도 할 겸 주변을 조금 둘러보고 오는 것이 어떻습니까?”

“응. 배려해줘서 고마워, 아저씨.”

“별말씀을요.”

 

피타고라스가 통신을 끊으려고 하는 그때. 리아나가 다시 말했다.

 

“아저씨.”

“예.”

“아저씨는 이모션 페스트에 대해서 많이 알지?”

“웬만한 사람보다는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소년, 올리버 말이야. 정말 가망이 없는 걸까?”

“조사를 더 해봐야 알겠지만, 마탄의 사수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아마 여지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노엘은 그렇게 생각 안 하고 있지?”

“예.”

“그리고 우리는 노엘을 돕고 있는 거지? 올리버를 도우려고…?”

“…예. 소용없다고 해봤지만 결과는 이미 알지 않습니까?”

“후후, 귓등으로도 안 들을 아이지.”

“뭐,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모션 플레이어를 돕는 것이 크루의 목적이니까요.”

“응응. 고마워. 덕분에 마음이 편해졌어.”

“다행이군요. 그럼 계속 두 사람의 관찰을 부탁합니다.”

“응!”

 

띠릭

 

“…후우.”

‘역시 그녀도 현실감각이 없기는 마찬가지인가.’

 

피타고라스는 안도와 피곤함이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 정보를 모두 공유하지 않은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그녀는 그가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했다.

 

‘리아나, 당신도 노엘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소망대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는 서치라이트를 크게 밝히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소년은 빛으로 돌아오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 같군요.”

 

방안이 서서히 밝아지자 낙서가 적힌 종이가 더 많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열 이십 삼십 백… 그리고 바닥에 책상에 책장에 벽에…

그곳은 그야말로 어느 소년이 셀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꾸준히 버려온 희망의 쓰레기통이었다.

 

 

-

 

※ Illust from Punishing Gray Ra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