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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재/[자작] 블레이드 코드

[블레이드 코드] Act.1-2장 피타고라스 - 10화

 

사아아…

 

피타고라스는 시티 시큐리티 센터를 떠나서 상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긴장을 풀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무색할 만큼 그 어디에서도 생명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바람을 따라 조용히 흐르는 모래의 발소리뿐.

 

‘도시 전체가 종말로 향하는 거대한 모래시계가 된 것 같군.’

 

모래알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건물들의 앙상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얼마 안 가서 이 시계는 끝을 맞이할 것이다.

 

‘…아.’

 

그 무엇에도 큰 관심을 주지 않고 걷고 있던 피타고라스가 돌연 멈춰 섰다.

 

‘오랜만인 걸.’

 

익숙한 무엇인가를 발견한 그의 두 눈동자에는 아름답게 핀 분홍 잎사귀들이 담겨 있었다. 홀로그램 따위가 어설프게 흉내를 낸 것이 아닌 진짜 벚꽃.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것은 그의 안경에는 비치지 않았다.

 

‘습관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군.’

 

그가 이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가 뜨자 멋대로 흘러나왔던 눈동자의 벚꽃은 그의 기억 속으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저벅 저벅 저벅

 

그는 앙상하게 말라붙은 벚꽃 나무 홀로그램 기기 앞으로 다가갔다.

 

스윽…

 

그리고 동작 버튼에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가져갔다.

 

“…쓸데없는 짓이야.”

 

그는 이렇게 말한 뒤돌아 걸어가더니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고 가던 길을 나아갔다.

 

 

“응? 아저씨, 무슨 말 했어?”

 

피타고라스의 나직한 혼잣말을 캐치한 리아나가 통신기를 통해 물었다.

 

“별것 아닙니다.”

“흐응…”

“아직 노엘과 올리버는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게~ 어디에 꼭꼭 숨었는지 보이지가 않네.”

“그렇습니까….”

“나 안 놀았어! 도시가 너무 크고 복잡해서 그런 거라구.”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만.”

“혹시 모르잖아? 쟤는 수다 떨기를 좋아해서~ 일은 제대로 안 하더라! 라고 생각할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오히려 정보를 숨기는 것이 아닐까 더 걱정이죠.’

 

피타고라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리아나는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여도 또 다른 꿍꿍이 속이 있어 보였다. 어디에 있든지 모두를, 모든 것을 의심할 것. 그것이 그의 생존 철칙이다.

 

“그런데 아저씨,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물어보지 말라고 하면 안 물어볼 겁니까?”

“당연히 물어봐야지?”

“하아… 말해보시죠.”

“나~ 이모션 비스트는 많이 토벌해 봤는데 생존한 숙주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거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것이 궁금한 겁니까.”

“정답~!”

“분명 블레이드 앙상블에 입단할 때 교육받았을 텐데요.”

“원래 교육 시간은 자라고 있는 것 아닌가? 헤헤….”

“리아나는 그냥 제가 하라는 대로 둘의 동향만 보고하시면 됩니다.”

“아이참, 아저씨. 무시하지 말구~”

 

피타고라스는 리아나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 옳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입단 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생존한 숙주를 마주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러나 리아나 정도의 경력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 봤을 터였다. 저 질문은 정말 궁금해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피타고라스에게서 무엇인가 확인하기 위한 것일까.

 

‘…이 정도는 기본 상식이니 오히려 알려주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가.’

 

“똑똑~ 여보세요, 아저씨~”

“리아나의 수준에 맞추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생각 중이었습니다.”

“와~ 은근히 무시하네. 나 똑똑하거든!”

“사람의 마음에는 묶여 있는 맹수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갑자기 퀴즈 타임? 그게 무슨 말인데?”

“내면의 감정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을 비유한 말입니다.”

“흐응~ 그게 이모션 페스트랑 무슨 상관이야?”

“이모션 페스트는 이 맹수를 날뛰게 만드는 병입니다.”

“아~ 그래서 이모션 페스트(Emotion Plague, 감정 질병)이라고 하는구나!”

“예. 디스페어(Dispair), 딜루전(Dilusion) 같은 분류는 어느 감정을 자극하는지를 의미하고요.”

“가장 중요한 것을 못 들은 것 같은데? 그래서 치료법은?”

“듣기만 하면 재미없을 테니 질문을 하나 해볼까요.”

“힝… 듣기만 해도 되는데.”

“이 병은 실체화되지 않은 이모션 몬스터가 마음 속에 기생하고 있는 겁니다.
놈을 외부에서 강제로 제거하려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어… 숙주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을까?”

“놈들이 인간처럼 죽는 것을 두려워 한다면 그게 정답일 수도 있겠죠.”

“응?”

“녀석들은 위협자를 제거하려고 무리하게 숙주를 잠식하기 시작합니다.”

“아….”

“운이 좋다면 불완전한 이모션 비스트가 되어 쉽게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다면….”

 

피타고라스는 필요 이상으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말끝을 흐렸다. 지금 리아나에게 최악의 상황을 말해서 도움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을 터.

 

“아저씨, 왜 말을 하다가 멈춰!”

“어쨌든 그래서 강압적인 방법을 쓰거나 숙주를 위기로 몰아넣어서는 안 됩니다.”

“말도 안 돼. 그러면 어떻게 해? 으~ 머리 아파!”

“외부에서는 불가능하다면 내부에서 밀어내야죠.”

“내부에서?”

“예. 숙주가 스스로 이모션 몬스터를 밀어내는 겁니다.”

“어….”

“왜 그러십니까?”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정말 그게 전부라면….”

“생각보다 너무 쉽다. 이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응! 그거 그거!”

“물론 말처럼 쉬웠다면 세상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이모션 페스트를 치료하는 방법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이모션 플레이어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죠.”

“오~ 드디어 다 왔어! 이모션 플레이어가 치료할 수~ 있다! 그리고 치료법은?!”

“미안하지만 그들이 어떤 원리로 이모션 페스트를 치료하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힝….”

“그저….”

 

피타고라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누군가를 회상했다. 외우주 존재의 등장으로 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버린 이 세계에서, 인품만으로 성녀라고 불리고 있는 누군가를.

 

“마탄의 사수 크루 빅토리아의 말을 빌리자면.
마음의 소리를 듣고,
감춰진 진심을 듣고,
블레이드 코드로 화답하여,
숙주를 구원한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흐응… 아저씨, 그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을 위한 거야?”

“올리버와의 대화를 위해서 그의 행적을 조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구나.”

“예.”

"."

 

“아저씨.”

“무엇입니까,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진지해져서는.”

 

리아나의 말투가 갑자기 굳어졌다. 피타고라스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대답하고 빠르게 그가 했던 말들을 되짚어 봤다. 문제는 없었다. 그가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통상적으로 알려진 사실들이었다.

 

“나는 사람 사귀는 것을 정말 좋아해.”

“그렇게 보입니다.”

“그래서 어느 조직에서든 편견 없이 많은 사람과 어울려 다녀봤어.”

“그렇군요.”

“그런데 그거 알아? 진심으로 친해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사귀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람들은 말이야, 아저씨.
네가 좋다, 친하게 지내자, 너를 위한 것이다. 같은 사탕발림 말을 자주 하는데.
그거. 사실 상대방을 자기 잣대를 대고 말하는 거거든.”

“….”

 

피타고라스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말에는 분명 그를 향한 가시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없어서 섣불리 그녀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단정 지어버려.
쟤는 타고났어, 쟤는 구제 불능이야 이렇게 말이야.
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본 것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

“아저씨.”

“…예”

“그 소년. 올리버.”

“…예.”

“사실 구할 생각 없지?”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올리버의 행적을 조사한다는 구실로 그 아이의 과거만 쫓고 있잖아.”

“대화를 위한 사전 조사입니다.”

“멋대로 속살을 들여다보고 대화를 하겠다?”

“예, 상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내 경험으로는 다들 대화라는 구실로 과거를 무기처럼 사용하던데?
상대방을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낙인찍으려고 말이야.”

“….”

“아저씨.”

“예.”

“다시 물어볼게. 아저씨는 올리버를 어떻게 할 셈이야?”

“….”

“혹시 그 아이의 과거를 이용해서 폭주시킬 셈 아니야? 빨리 끝내려고?”

“….”

 

피타고라스는 걸음을 멈추고 안경을 벗어 얼굴을 어루만졌다. 체크메이트였다.

 

“부정해도 소용없겠군요. 어떻게 알았죠?”

“확신은 없었어. 과거를 쫓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유가 있을지 알았지.
아저씨를 효율만 따지고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어른으로 생각했으니까.”

“그랬습니까. 그러면 언제 확신한 겁니까.”

“마음의 소리를 듣고 감춰진 진심을 듣는다.”

“…빅토리아의 말이죠.”

“응. 그 이야기를 듣고 확신하기 시작했어.
아저씨는 올리버의 인생을 멋대로 정해 놓고 근거만 찾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셈이죠?”

“간단해. 아저씨와는 절교야 절교.”

“절교라… 그것참 안타깝군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요.”

“아저씨가 무엇을 하려고 하든 나랑 노엘이 먼저 해결할 거야. 두고 봐.”

“그렇군요. 하지만 저는 두 분을 위해서라도 그 소년을 포기하게 만들어야겠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 세상은 이불 속 어린아이가 살아가기에는 너무 위험하니까요.
더 큰 위험에 빠지기 전에 세상에 대해 알려주는 것도 어른이 할 일입니다.”

“…최악이야.”

 

 

“…미움받고 말았군요. 뭐, 어쩔 수 없나요.”

 

피타고라스는 안경을 다시 쓰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차피 환상 즉흥곡 크루는 말 그대로 환상일 뿐이니까요.”

 

 

그 시각. 블로섬 시티의 어느 빌딩 위, 누군가 스나이퍼 라이플의 스코프로 피타고라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

 

그가 스코프에서 눈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옥상의 거센 바람이 그의 분홍색 긴 생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눈시울은 어째서인지 약간 붉어져 있었다.

 

“…또야.”

 

리아나는 실망과 절망이 섞인 목소리로 나지막이 한숨 섞인 말을 내뱉으며 피타고라스가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 잠시 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미안하지만 아저씨. 올리버의 삶은 그 아이의 것이야.
누구도 남의 삶을 마음대로 주무를 권리는 없어.”

 

그녀는 정신을 차리려 붉어진 눈을 열정적으로 비비고는 말했다.

 

“우선 노엘을 찾아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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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llust from ne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