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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재/[자작] 블레이드 코드

[블레이드 코드] Act.1-1장 말없는 소녀 - 5화

‘아….’

 

애타게 찾았던 소녀가 눈 앞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올리버는 입을 열지 못했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생전 처음보는 데저트 타이거의 습격만으로도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런 괴수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금… 저 소녀가 날 구해준 거야?’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누구든 그녀를 지켜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

 

괴수의 죽음을 확인한 소녀는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봤다. 그녀의 푸른 눈은 방금 전까지 사람을 손쉽게 찢어발길 것 같은 괴수와 대면했는데도 처음 본 그날처럼 평온하고 고요했다.

 

‘너는 대체….’

 

 

소년은 그녀를 찾으려고 했던 것은 까맣게 잊고 이 신비로운 소녀를 넋을 놓고 쳐다봤다.

그러나 소년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소녀는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소년은 퍼뜩 정신이 들어서 다급하게 외쳤다.

 

“기, 기다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소년은 순간 자신이 말하고도 당황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틀림없었다. 지금 그녀를 붙잡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

 

“…….”

 

도약할 것 같은 자세를 취했던 소녀는 소년이 부르자 멈칫했다. 그리고는 몸을 완전히 그에게 돌렸다.

 

즈응

“으앗!”

 

밝게 빛나는 뜨거운 것이 눈앞을 지나가자 소년은 화들짝 놀랐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소녀가 들고 있었던 독특하게 생긴 빔 액스였다. 긴박한 상황과 소녀에게 정신이 팔려 소년은 그것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

 

소녀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가녀린 손으로 빔 액스의 도끼 머리 부분을 만지자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딩 디리딩…

 

그 소리에 소년은 약간 불쾌하다는 기분을 느꼈다.

 

즈응…

 

멜로디가 사라지는 것에 맞춰서 빔 도끼날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빔이 완전히 사라지자 소녀는 빔 액스를 반대로 돌려서 머리 부분을 잡았다. 거기에는 독특한 무늬가 그려져 있었는데 소년은 그것을 한 번에 알아봤다.

 

‘자주색… 양귀비.’

 

그는 그제서야 빔 액스의 정체를 깨달았다. 소녀는 그녀의 기타를 거꾸로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양손으로 기타 넥을 잡고 그것을 도끼처럼 휘둘렀던 것이다.

기타에 도끼라니.

 

‘하아……’

 

터무니없는 상황에 소년은 온몸의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 앉아 고개를 떨궜다.

 

스윽

 

갑자기 그의 앞에 그림자가 지자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

 

소년은 깜짝 놀랐다. 소녀가 바닥에 주저앉은 올리버의 앞에 다소곳이 앉은 것이다. 그리고는 올리버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마치 이틀 전 그날처럼.

 

“어, 어…”

 

당황한 올리버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소녀는 이번에도 말없이 올리버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여전히 소년을 재촉하기보다는 감싸주고 있었다. 그러자 혼란했던 올리버의 마음은 점점 안정됐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거야.’

 

올리버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리고 잠들지 못했던 지난 밤, 홀로 무수히 상상했던 상황들을 떠올리며 마침내 말을 꺼냈다.

 

“그… 구해줘서 고마워.”

끄덕

 

용기내 꺼낸 첫마디에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오늘 아침에 대피소에 왔었어?”

끄덕

 

이번에도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식량상자도 네가 두고 간 거야?”

끄덕

 

다시 한번의 끄덕거림.

 

‘왜지? 말을 할 줄 모르나?’

 

슬슬 소년은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우선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참, 내 소개를 안 했네… 난 올리버야. 넌?”

“…노엘.”

 

처음으로 소녀가 말했다.

 

‘뭐야, 말할 수 있잖아?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의 눈망울처럼 넓고 시원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너무 차분하고 딱딱했다.

 

“대피소에 왔었다고 했지? 그럼… 혹시 내가 자고 있는 것도 봤어?”

“응.”

‘뭐야, 봤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늘었다.

 

“그럼 왜 깨우지 않고 그냥 간 거야?”

 

소년은 다급히 되물었지만 곧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사라지라고 했으니까.”

 

소년은 귀를 의심했다.

 

‘뭐…?’

 

사라지라고 했으니까. 분명히 그랬다. 처음 만났을 때 올리버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단지 그것 뿐?’

 

질문을 할수록 의문이 해결되기는커녕 늘어만 갔다.

 

“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깨우지 않고 갔다는 거야?”

“그래 맞아.”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소년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럼 혹시 아까 그냥 가려고 했던 것도…?”

“응.”

 

조금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한 대답은 의심을 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었다. 또한 거기에는 어떤 원망이나 조롱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 소녀가 혹시 기계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올리버는 듣고자 하는 다른 질문을 이어갔다.

 

“그럼 식량 상자는? 그건 왜…?”

“도움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

“…….”

 

취조를 하는 듯한 일문일답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니. 어색하다고 생각한 것은 소년뿐일지도 모른다. 소녀는 여전히 평온한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니까.

 

‘이러다가는 끝이 없겠어.’

 

소녀는 여전히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소년은 그의 마음 한 켠에 계속 거슬렸던 질문을 꺼내기로 결심했다.

 

“그럼 혹시… 블레이드 앙상블의 코빈이라는 남자를 알고 있어?”

“응. 알고 있지.”

 

그 대답에 소년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예상했지만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나에 대해서 뭔가 말하진 않았어?”

“말했어.”

 

말했다. 그 말에 소년의 미간이 약간 일그러졌다.

 

“…어떤?”

 

그렇게 되묻는 소년의 입술과 표정은 다소 굳어 있었다.

 

“네게 도움이 필요할 거라고 했어.
희망이 없겠지만 그래도 관심 있으면 손을 내밀어보라고도 했고.”

“!!”

‘뭐라고…?’

 

소년은 또 다시 끓어 오르는 분함에 이빨을 깨물었다.

 

‘그런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소년의 분노에 찬 외침은 공기를 울리는 대신 마음 속에 울렸다.

소년은 소녀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무엇을?”

“너희, 블레이드 앙상블이라는 사람들.
무슨 소리가 들리니 마니 하면서 남에 대해 멋대로 판단하고 말하잖아.
그래, 너도 들리는 거지? 넌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소년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떨리고 있었다.

 

“난….”

 

소녀가 말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하는… 아니, 코빈이 말했던 것처럼 듣고 있는 것이겠지.’

 

올리버는 숨을 죽이고 소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인지 진짜 들리는 것인지 같은 진실은 사실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으니까.

잠시 후 소녀가 입을 열었다.

 

“…코빈의 말이 맞아. 어느정도는.”

 

그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이런 게 아니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큰 실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소년이 그녀의 의도를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도 날 도와줬다고…?’

 

소년의 표정이 순간 분노로 험악하게 변했다.

 

‘지금… 불쌍하다고 동정하는 거야?’

 

희망이 없다면서 도움을 줄만한 이유.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소년에게 삶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고통 없는 자유 죽음. 그것은 누구에게도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혼자라서? 쓸쓸해 보여서? 죽어가고 있어서?
그래서 돕겠다고? 먹을 것도 주고?’

 

소년에겐 그런 도움은 필요 없었다. 역겨웠다. 소년은 소녀를 찾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가.”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목소리에서는 이제 떨림도 분노도 느낄 수 없었다.

 

“난 값싼 동정 같은 건 필요 없어.”

“…….”

 

하지만 소녀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지난 번에 두고 간 것도…”

 

소년은 말문이 막혔다. 소녀는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못 들었어? 가라니까.”

“올리버.”

 

소녀가 눈을 감은 채 갑자기 단호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소년은 움찔했다.

 

“뭐, 뭐야.”

“코빈의 말이 전부 맞다고 하지는 않았어.”

“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올리버는 노엘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소녀가 양손으로 소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뭐, 뭐하는 거야.”

 

당황하는 소년의 손에 살짝 힘을 줘서 따뜻하게 감싸는 소녀. 그녀는 눈을 뜨고 소년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는 말했다.

 

“올리버.”

“…왜.”

 

“지금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것만은 알아줘.

난… 너에게 무엇도 강요하지 않을 거야.
조용히 하라고 하면 더는 말하지 않을 게.
먹을 것을 가져다 놓지 말라고 하면 그러지 않을 게.
이 도시에서 떠나라고 하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게.”

 

“…내가 죽고 싶으니 말리지 말라고 해도?”

“맞아.”

“좋아, 그럼…“

“대신 네가 정말 원할 때만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소년은 단 한 순간에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삐삑 삐삑 삐삑

 

그때 소녀의 손목에 있는 장치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띡 지잉 띡띡띡

 

소녀가 손목의 장치를 조작해서 홀로그램을 띄운 후 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아직 안돼.”

 

내용을 확인한 소녀는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하면서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 게.”

 

소녀가 떠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직 질문의 대답을 듣지 못한 소년 역시 다급하게 일어났다.

 

“잠깐 기다려! 아까 그게 무슨...”

“올리버.”

 

소녀는 뒤돌아 떠나려다가 잠시 멈추더니 소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기억해 줘.
네가 진심으로 포기하지 않는 한 난 네게 손을 내밀 거야.
만약 정말 희망이 없다고 해도 손을 내민다면 놓치지 않을 게.

하지만 네가 마음 속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도와줄 수 없어.
그러니 그 목소리를 직접 내게 들려 줘.
부디… 네 진심을 외면하지 마.”

 

“잠깐! 노엘!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곧 다시 찾아올 게.”

 

말을 마친 소녀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건물 위로 올라가더니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올리버는 소녀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마음 속 목소리? 진심? 그게 다 무슨 말이야…’

 

그러다가 문득 그는 노엘의 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깨닫고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소년의 마음에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그럴리가 없어.
그렇다면 이때까지 내가 해왔던 시도들은?
그것도 다 거짓이라고? 내가 거짓으로 그런 일을 했다고?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노엘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던 올리버는 급히 그녀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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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ust from Punishing gray ra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