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내러티브의 정의
by Dreamrugi
1. 시작하기 전에
이전 글에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서사narrative가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글의 카테고리에서 연구하고자하는 것은 단순한 서사가 아닌 게임 내러티브game narrative이죠. 많은 학문들이 시대와 기반 매체들을 거치면서 내용이 변화왔듯이 게임 내러티브라는 것도 전통 서사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할 수 있을리 없습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서사라는 것이 게임이라는 매체와 어우러지면서 어떤 정의를 새로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이전 글에서는 전달법이나 재미에 대한 내용을 다뤘었는데 이 글에서는 그 부분보다는 조금 더 근원적인 정의와 의미에 대해서만 고민해보려 합니다. 전달법이나 재미는 글 하나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방대하기 때문이죠. 참고로 고유 명사에서의 한글과 영어의 혼용을 방지하기 위해 앞으로는 게임 서사라 칭하지 않고 게임 내러티브라고 칭하려 합니다.
이전 글에서 정리했던 전통 서사의 정의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서사 세계 속의 사건의 재현 혹은 사건의 연속
- 글자 모둠이 서사라는 것을 띄기 위해서는 사건, 행위들이 연속적이거나 일관성 있어야 함.
- 서사narrative라는 단어의 어원은 알다granus와 말하다narro 에서 파생된 것
2. 게임 내러티브에서의 사건
게임 내러티브에서의 사건은 게임의 목적성과 연관이 깊다고 생각됩니다. 게임에서 제공하려 하는 핵심 플레이, 경험과 연관된다는 것이죠. 서사를 읽고 어떤 의미나 감동을 전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목적인 전통 서사와 달리 게임은 본질적으로 직접 플레이하는 것이 목적인 콘텐츠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든 게임플레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사학 강의에서 의미없는 단 하나의 텍스트도 있어선 안 되며 모든 등장인물은 진짜 사람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게임 내러티브의 사건은 게임 플레이를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생각됩니다. 스토리 구조 상 대단히 중요한 구성적 사건을 만들어 두었고 그 사건이 없으면 이야기 전체가 진행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게임플레이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죠.
※ 어쌔신 크리드 : 오디세이
이 게임의 기저에 깔리는 가장 큰 사건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입니다. 이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있어서 어쌔신 크리드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어쌔신 크리드의 이야기와 플레이를 구성하기 위해서 펠로폰네소스를 썼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시 강조하면 '도구'인 것이죠!
구성적 사건과 보충적 사건과 관련해서는 전자는 게임 내러티브라 하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지만 보충적 사건의 경우는 게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게임은 메인 시나리오 흐름 외에도 다양한 콘텐츠 및 시스템을 위한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위쳐3 게임에서 도입부에 베스미어와 기본전투 튜토리얼을 하는 부분을 생각하면 전투 훈련을 하는 하나의 사건은 전체 이야기 흐름에는 없어도 그만인 것이지만 튜토리얼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내용입니다.
※ 위쳐3
게임 대단히 초반에 등장하는 베스미어와의 전투 훈련입니다. 이 보충적 사건 자체는 없어도 게임 전체 이야기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전투 튜토리얼이라는 게임 콘텐츠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또한 뭔가를 배워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집중도가 평소보다 높아지는 시기이기도 하죠.
많은 게임 개발자들, 특히 콘텐츠를 기획하는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게임을 개발하다보면 이런 시스템적인 보충적 사건(튜토리얼, 밸런스적인 이슈로 추가되는)은 무수히 많이 변경됩니다. 전투 훈련이 극 초반에 나오는가 하면 일주일이 지나고 나면 갑자기 뒤로 빠져야 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업의 비중을 낮추거나 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메인 스토리보다 더 주의해서 사건을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특히 튜토리얼의 경우 플레이어 성향을 막론하고 집중도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게임을 할 때 평소에 시나리오를 유심히 읽지 않던 플레이어들도 이 시점에는 시나리오를 읽게 됩니다(평소에 시나리오를 읽던 유저들은 말할 것도 없겠죠). 어차피 또 바뀔거라 생각해서 퀄러티를 낮게 잡았다가는 플레이어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게 됩니다.
두번째 이유는 필연적으로 대부분의 튜토리얼이 게임의 극초반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주요 이야기에 대한 재미를 전달하기도 전에 플레이어들은 무수히 많은 시스템적인 보충적 사건들을 접하게 됩니다. 특히 최근처럼 모바일 게임들이 흥행하게 된 시대에는 어떻게 해서든 초반에 모든 콘텐츠와 시스템을 알려주고 빠르게 과금을 유도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튜토리얼을 초반에 우겨넣는 행태가 많이 벌어지고 있어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렇게 하지 않으려 해도 사업적, 기획적 이슈 때문에 고쳐지지 못하고 있죠). 이 때문에 플레이어가 게임의 주 이야기를 경험하기도 전에 무수한 튜토리얼과 저 퀄러티의 이야기를 보고 게임에서 이탈합니다. 따라서 이런 보충적 사건들은 오히려 주 이야기보다 더 힘을 실어서 조금이라도 이탈률을 줄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면 다음과 같습니다.
- 게임 내러티브의 사건은 게임 플레이를 위한 도구입니다.
- 게임 내러티브에서 보충적 사건은 다른 콘텐츠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 구성적 사건보다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 리니지2 레볼루션
이 게임만 봐도 게임을 시작하고 튜토리얼 지역인 말하는 섬을 벗어나기까지 적어도 10개 이상의 튜토리얼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말하는 섬만 했다고 해서 게임의 메인 시나리오 재미를 느끼긴 어렵겠죠(튜토리얼 때문에 집중도가 떨어지는 것도 있고). 조금이라도 게임의 퀄러티를 높이고 튜토리얼의 지루함을 줄이기 위해선 그만큼 시스템적인 보충적 사건들 자체가 재미를 줘야 합니다. (가장 좋은건 튜토리얼의 간격이나 분량 자체를 조절하는 것이지만 말이죠. :-))
3. 게임 내러티브화 : 게임에서의 서사화
시작하기 전에 알아본 전통 서사에 대한 간단 정리 중 두번째 항목을 보면 글자 모둠이 서사라는 것을 띄기 위해선 사건이나 행위들이 연속적이거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이때 이 연속적인 일관성을 띄도록 만드는 작업을 서사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게임 내러티브에서의 서사화, 즉 게임 내러티브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앞서 2번 항목에서 살펴봤듯이 게임에서의 사건은 단순히 사건 자체만 볼 것이 아니라 거기에 딸려 있는 게임 콘텐츠와 시스템을 함께 봐야 합니다. 이는 게임에서 제공하는 모든 콘텐츠는 연속적인 일관성(서사화)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어떤 게임이 게임 내러티브화가 잘 되어 있다라는 말은 모든 콘텐츠와 시스템들이 하나의 큰 스토리 속에서 일관성 있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메인 퀘스트 콘텐츠는 말할 것도 없고, 대단히 라이트한 서브 퀘스트 콘텐츠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읽을거리, 마을주민 NPC의 말풍선 대사 하나같은 모든 시나리오 텍스트는 물론이며 성장 시스템, 스킬 시스템, 전투 시스템까지도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2019년에 발매된 프롬 소프트웨어의 세키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황자를 모시는 닌자로써 황자를 구하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는 것이 이 게임의 주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플레이어가 사용하는 기술이나 무기, 전투방식은 모두 닌자 컨셉을 기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기술의 모듬들은 유파나 닌자도구를 기준으로 목록화되어 있으며 각 기술을 설명하는 텍스트 역시 '닌자라면'이라는 식으로 닌자의 전투법을 강조합니다. 이번에는 또다른 예시로 2018년에 발매된 어쎄신 크리드 오디세이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게임은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고대의 혈통을 이용해 세계를 좌지우지하려는 교단과 스파르타 출신의 주인공의 혈투를 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게임의 핵심 콘텐츠는 교단원을 찾아내 암살하는 것, 전쟁 상황을 이용해 돈을 버는 정복전이나 암살 의뢰 등의 콘텐츠로 주로 채워져 있습니다.
※ 세키로
세키로의 기술들이 닌자가 사용할 법한 유파 기술로 되어 있는 것을 단순히 '캐릭터가 닌자니까'라고 일차원적으로 이해해선 안 됩니다. 캐릭터가 닌자이어야 하는 이유, 그가 닌자가 되어야만 했던 이유, 그가 닌자로써 앞으로 할 일 등 게임 전반적으로 연속성과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금 더 가벼운 콘텐츠는 어떨까요? CD 프로젝트 레드에서 발매한 위쳐3를 보면 궨트라는 카드 게임이 서브 게임으로 등장합니다. 카드 게임이라고 하니 게임 내러티브화되어 있지 않을 것 같지만, 궨트는 위쳐 세계관에서의 고대의 전쟁을 카드로 구현해서 주민들이 놀이로 가지고 논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카드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나 전술 카드들이 게임 세계관 속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죠. 의심할 것도 없이 게임 내러티브화되어 있는 콘텐츠인 것입니다.
전통 서사에서는 의미없는 단어는 넣지도 말라는 말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서사적으로 연속성, 일관성 없는 텍스트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게임이 제대로 된 게임 내러티브를 가지기 위해선 게임 스토리와 연관 없는 콘텐츠나 시스템은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게임 내러티브화에 대해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게임 내러티브화란 게임 스토리 사건 외에도 게임에서 제공하는 모든 콘텐츠, 시스템이 서사적 일관성을 가지도록 한다는 의미입니다.
- 콘텐츠, 시스템의 범주에는 퀘스트에서부터 전투 시스템, 서브 콘텐츠까지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 위쳐3의 궨트
얼핏보면 게임 내러티브화되어 있지 않은 그저 카드 게임일 것 같지만, 그 기저에는 위쳐 세계관 속에서 고대에 있었던 북부 왕국과 제국간의 전쟁을 카드로 재현했다는 설정이 깔려 있습니다.
과거든 현재든 많은 게임들이 게임 내에서 즐길 수 있는 서브 콘텐츠하면 일단 다 낚시를 넣고 보는데, 그렇기 전에 낚시 콘텐츠가 왜 들어가야 하는지 고민해봐야 할 겁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개발하는 게임의 세계관에 적합해보이는 놀이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더 차별성 있는 게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4. 어원으로부터 : 무엇을 말하고, 알기 위한 것인가
서사narrative라는 단어는 알다granus와 말하다narro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전통 서사에서는 알고 말하려는 것이 사건이라고 한다면, 게임 내러티브game narrative는 무엇을 알고 말하려는 것일까요?
게임 스토리를 구성하는 사건을 전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전통 서사처럼 사건에 대해 말하고 또 알도록 하는 것이 목적을 가지곤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듯이 게임은 단순히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한 콘텐츠가 아니기 때문에 생각이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게임 콘텐츠의 궁극적인 목적은 게임플레이를 통해 어떤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죠. 다시말해 게임 내러티브는 게임에서 제공하려는 '경험에 대해 말하고 그것에 대해 알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르가 RPG라면 게임에서 제공하는 핵심 역할과 그 경험에 대해 말하고(혹은 전달하고) 그 경험을 플레이어가 알 수 있도록(인지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 게임 내러티브는 게임에서 제공하고자 하는 경험에 대해 말하고, 또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게임 내러티브 기획은 무엇을 기획하는 것인가요?"라는 질문이 주어졌을 때 단순히 "게임 스토리를 구상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게임 내러티브를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서사까지 밖에 생각이 미치지 않은 것입니다. 위 질문의 옳은 대답은 아래와 같은 대답이며 이것이 게임 내러티브의 궁극적인 정의와 방향이 아닐까 생각하며 글을 마칩니다.
"게임 내러티브 기획은 게임 세계 속 스토리와 서사담화를 구상하는 것을 넘어서 게임의 핵심 경험, 스토리에 기반하여 콘텐츠, 시스템들의 서사적 일관성을 확보하고 이것들이 플레이어에게 잘 전달될 수 있는 방안을 기획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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