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 창고_게임/게임 내러티브

[연구] 게임 내러티브에서의 주인공

게임 내러티브에서의 주인공

by Dreamrugi


1. 이 고찰이 시작된 이유

  프로젝트N의 시나리오 리뷰 회의에서 시나리오 기획자 분이 발표 중인 분께 드린 피드백 중에 인상이 깊었던 내용이 있었습니다. 바로 '게임 시나리오에선 플레이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지만 장르를 불문하고 서사 구조를 가진 많은 게임들, 특히 플레이어의 정체성이 게임 세계 속의 어떤 인물을 대변하지 않고 '플레이어 자신'인 경우에는 이 부분을 놓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반영하는 것에 어려움에 많이 직면하는 것 같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게임 내러티브에서의 주인공에 대해 고찰해보고 게임 플레이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때의 어려운 점을 정리해본 다음 그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 갓 오브 워 4와 엘더스크롤5

   두 게임 모두 서사를 가진 게임이지만 주인공의 구성 방식은 분명히 다릅니다.

   갓 오브 워 4는 주인공을 크레토스라고 정의할 수 있지만 스카이림은 어떨까요?



2. 게임 내러티브에서의 주인공

  게임 콘텐츠의 가장 큰 특징은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다른 서사 매체들, 이를테면 소설이나 영화 등에선 느낄 수 없는 '직접 참여'의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 위쳐 소설을 읽는 독자는 게롤트를 완전히 분리된 세계에서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지만, 같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게임에서 제공될 때는 플레이어가 게롤트를 ''로 인지하면서 실제로 게임 세계 속에 존재한다고 믿게 됩니다. 바로 이 ''로 인지하는 현상은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의 정체성이 다른 인격체를 대변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일 때 완벽해집니다. 말이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엘더스크롤5 스카이림을 예로 들자면,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다른 누구를 대변하지 않고 스스로가 가상의 도바킨이 되어 모든 결정을 주체적으로 결정합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야 점은 게임 내러티브에서 콘텐츠의 소비자는 더 이상 제 3자가 아니라 1인칭 시점을 가진 주인공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특히 서사 구조를 많이 가지고 있는 RPG 장르의 경우는 이 부분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역할에의 몰입을 위해서는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사건이 발생, 전개, 해결되도록 구성하여 스스로가 더 숙련되었다는 느낌을 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강한 적이 등장했다고 하더라도 그 적을 다른 존재가 물리치고 플레이어는 단지 보조적인 역할에만 머물게 된다면 성장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만들어 부정적인 경험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적절한 도전 과제를 받고 그것을 극복하는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지 누군가의 보조자가 되고 싶어하진 않기 때문이죠.


※ 세계에서 2번째로 성공한 MMORPG라고 하는 파이널 판타지 14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빛의 용사'라는 이름을 가지고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 서사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이때 이 빛의 용사는 다른 어떤 인격체가 아닌 '플레이어 자신'으로써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3. 실수 그리고 난관

  게임 내러티브에서는 플레이어가 온전한 주인공이 된다는 점은 매우 강력한 이점이지만 이로 인해 발생하는 실수와 많은 난관들도 있습니다. 

먼저 실수라는 것은 시나리오 기획자의 실수를 이야기합니다. 게임 이전의 서사들은 모두 콘텐츠 소비자가 주인공인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플레이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형태에 익숙치 않으면 플레이어는 뒷전으로 놓고 게임 속 인물들로만 주요 사건을 구성하고 플레이어는 단지 지켜보거나 퀘스트 같은 노역만 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시나리오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가지지 않은 그저 '잡일만 하는 매우 쎈 모험가01' 정도의 포지션 밖에 가지지 못하는 것이죠.


※ 리니지2 레볼루션의 인트로 컷신

   플레이어는 은빛용병단의 일원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 메인 시나리오에서 플레이어가 빠지더라도 상관없는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위와 같은 실수는 시나리오 기획자가 익숙해지고 주의해서 놓치지 않으면 되기 때문에 난관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진정한 난관은 바로 이것을 지키기 위해 직면해야 하는 많은 어려움들입니다. 주인공이 플레이어 자신이 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주인공이 다중인격자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절대로 측정할 수 없는 불특정 다수의 플레이어들 모두의 '개성'에 맞춘 시나리오를 쓰긴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서사나 인격체를 대변하는 게임들에선 크레토스면 크레토스라는 개성이 명확한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일관성 있는 주인공에 의한 서사 전개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정체성이 플레이어 자신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엘더스크롤5를 예로 들면 어떤 도바킨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용을 때려잡고 싶을 수도 있지만 어떤 도바킨은 용은 뒷전이고 자유롭게 세계를 모험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또한 살려달라는 도적을 자비롭게 놓아주는 도바킨이 있는 반면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처단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주인공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명확히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서사를 하나의 줄기로 만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대략 2가지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는 주인공의 내/외적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경우입니다. 많은 서사의 핵심 재미 중 하나는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면서 발생하는 재미입니다.

주인공이 즐거우면 같이 즐거워 하고 슬프면 함께 슬퍼하며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면 진심으로 안타까워 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주인공이 독자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재미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플레이어 스스로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일단 앞서 이야기했던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는 모든 표현이 불가능해지고 '직접 플레이어가 감정을 느끼는 주체'가 되도록 구성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기존 서사에서는 주인공의 10년지기 동료가 희생하여 사망하게 된 경우, 구태여 그들이 원래 친한 사이임을 장황히 설명하지 않아도 '10년 지기라면 그럴수도 있지'라는 수준의 개연성만을 맞춰주면 감정 이입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플레이어가 주인공이 되는 게임들의 경우는 플레이어가 실제로 동료를 '잃기 싫은 나의 동료'라고 인지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현실 세계에서도 그 정도의 관계를 형성하려면 각고의 노력과 친분을 쌓아야 하는데 게임에서 단기간에 그런 관계를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겁니다. 심지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인지하도록 만들려 하더라도 수많은 개성을 지닐 플레이어들이 같은 감정을 느낄지는 미지수이기까지 합니다. 단순히 공감하는 것과 실제로 스스로가 느끼는 것은 매우 큰 차이이기 때문이죠. 이런 점들을 간과하고 다른 인물을 통해 혹시라도 플레이어에게 '너무 슬퍼하지마, 네 마음 잘 알아'라고 대사를 하기라도 한다면 '난 슬프지도 않은데 무슨 말이지'라는 인지의 괴리가 발생하여 게임의 몰입이 단숨에 깨지게 될 겁니다.


  두번째는 주인공이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우입니다. 서사에는 스토리의 흐름이나 인물 관계를 결정짓는 많은 결정사항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주인공에 의해 좌우됩니다. 플레이어가 게임 속 인격체를 대변하는 경우에는 플레이어게 굳이 결정권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위쳐3의 게롤트가 플레이어의 의사와 관계없이 어떤 결정을 내리던 간에 게롤트는 원래 그렇게 결정하는 성격이다라고 해도 인지적으로 문제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플레이어가 주인공은 나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면 문제가 매우 커지게 됩니다. 분명 주인공은 나라고 인지하고 있는데 캐릭터가 멋대로 결정을 해버린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정체성을 깨버리는 것이 되어 마찬가지로 인지 괴리감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플레이어 캐릭터가 사소한 대사 하나 조차도 해서는 안 됩니다.

  

※ 엘더스크롤5 스카이림

   도바킨이라는 이 인물을 대변하는 인격은 도대체 몇 개가 될까요?

   캐릭터의 정체성이 플레이어 자신인 이상 플레이어 숫자만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4. 난관 헤쳐나가기

  난관을 인지했던 많은 게임들 이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해왔는데, 그것을 정리하면 대략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부터 현실과 타협한 방법 순서로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첫번째 방법은 위쳐3,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등에서 볼 수 있는, 플레이어가 감정 표현이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이른바 선택지를 제공하는 방법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지가 '유의미한 선택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임에서 어떤 선택지가 유의미하다는 것은 곧 그 선택지로 인해서 플레이 경험이 달라진다는 것으로, 인물 간의 관계(호감도)가 유동적으로 변화하며 플레이어에 대한 인물의 행동이나 말투가 달라지거나 플레이어가 내린 결정으로 인해 스토리에 분기가 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위쳐3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으로 결말에서 함께 하게 될 여성 NPC가 달라진다거나, 게롤트의 딸인 시리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역시 플레이어가 어떤 결정을 내렸느냐에 따라 마커스가 평화주의자가 될 수도, 폭력집단의 리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방법은 게임성을 확보해 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선택지를 추가하면 추가할수록 작업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특히 모바일 같은 빠르게 출시해야 하는 개발 환경에서는 더욱 현실성이 떨어지죠. 심지어 게임을 뒤로 돌려서 분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한 콘텐츠까지 모두 즐기려는 플레이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위 대작이라 일컬어지는 콘솔 게임들이 아닌 이상 반영하기 어려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 19.09.08 추가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꼭 주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유의미한 선택지의 범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전 글 중 하나인 '매체로써의 게임과 기존 매체의 장단점 비교'글에서 언급했듯이 유의미한 선택지라는 것이 반드시 '어떤 분기 컨텐츠를 만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고 이 글을 읽어보니 마치 꼭 분기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처럼 써둔 것 같아서 정정합니다.)

이전 글에서도 매번 강조했듯이 선택지에서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콘텐츠 강국이라고 하는 일본에서 출시한 게임들을 보면 분기를 만들지는 않더라도 중요한 대사에 관련해서는 대사 몇 줄을 바꿔주는 수준의 선택지를 제공합니다. 심지어 선택지를 단 1개만 제공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는 개발자들이 그것을 통해서 어떤 분기를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명백히 '상호작용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비록 게임 속 인물들이 플레이어 자신의 정체성은 아니지만 무수히 많은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플레이어의 선택 하나하나가 인물들의 성향을 만들어 나가니 넓은 의미에선 엄밀히 따지면 인물들이 곧 플레이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두번째 방법은 엘더스크롤, 데스티니 등의 게임에서 사용한 방법으로 플레이어는 어떤 감정표현도 하지 않지만 주변 인물의 행동으로 간접표현하는 방법입니다. 플레이어에게는 어떤 유의미한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으며 그들은 게임에 정해진 스토리에 따라 진행해야 할 뿐입니다. 대신 그 행동의 결과로 플레이어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인식이 일방향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물들의 대사나 주변 환경을 통해 플레이어에게 전달되죠. 만약 콘텐츠 구성을 인지 괴리감 없이 플레이어가 자연스럽게 인물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구성할 능력만 있다면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용도 첫번째 방법에 비해 저렴할 뿐만 아니라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주체는 여전히 플레이어이기 때문이죠.

  데스티니를 예로 들어보자면 플레이어는 어떤 유의미한 선택지를 갖지는 않지만 주어진 임무를 해결해나감에 따라서 주변 동료들의 신뢰를 얻고 나중에는 세상을 구한 구원자 취급을 받습니다. 엘더스크롤의 경우 역시 드래곤본이라는 역할을 수행함에 따라 주변 인물들에게 신뢰를 받고 강함을 인정받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간접표현'으로 인물들이 플레이어가 어떤 행동, 감정을 취했다는 식의 표현을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3번 항목에서 말한 것처럼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자신이라고 인지하는 상황에서 플레이어의 감정을 표현하면 인지적 괴리감이 발생하게 되어 몰입이 크게 깨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치명적인 단점 역시 가지고 있는데, '서사 전달과 감정 이입에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3번의 난관 부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야기의 주체가 플레이어가 되기 때문에 인물들이 주로 감정을 느끼는 주체는 플레이어가 되게 되는데, 선택지를 제공하지 않고 어떤 대사도 진행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관계나 감정이 상호작용 없이 인물에서 플레이어에게로 일방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설득력을 가지기 쉽지 않습니다. 나는 이 인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이 인물을 자꾸 나를 신뢰하고 마음에 들어하는 상황인 것이죠.


※ 19.09.08 추가

  회사 실무 중 시니어 시나리오 기획자 분께서 좋은 의견을 제시해주셔서 추가합니다.

두번째 방법과 관련하여 기저에 깔려야 하는 설정은 바로 '플레이어의 사명 또는 운명'입니다. 플레이어에게 선택지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거부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즉,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플레이어에게 '넌 반드시 이것을 해야 해'라는 식의 유일자 설정이 필요합니다. 가장 흔한 예를 들자면 '위기에 처한 세계를 구할 영웅이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건 바로 너야'라는 식이죠. 이 시나리오를 전개하여 엔딩을 볼 수 있는 존재는 플레이어 뿐이라는 '운명론'적인 이야기를 구성하여 플레이어로 하여금 '나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내가 해야겠군'이라는 인식이 들도록 합니다.


※ 데스티니 가디언즈

    플레이어는 어떤 선택지도 가지지 못하고 주어진 스토리의 흐름에 따라 묵묵히 일을 해결해나가지만

    그에 따라 주변 인물들이 플레이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집니다. 


  마지막 방법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로 대변되는 대부분의 MMORPG에서 볼 수 있는 방법으로, 관계의 변화나 감정 표현, 중요한 의사 결정이 철저하게 게임 속 인물들 위주로 전개되는 방식입니다. 인물 간의 관계 변화, 갈등 역시 게임 속 인물들 간에 일어나고 중요한 의사결정도 그들이 결정합니다. 플레이어는 그저 사건을 돕거나 지켜볼 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예로 들자면 격전의 아제로스 확장팩에서 주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실바나스와 바인, 사울팽이며 그 갈등 관계 속에 플레이어는 위치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어떤 유의미한 선택지 없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해주거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기만 할 뿐이며, 플레이어가 빠지더라도 무난히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의사 결정 역시 플레이어가 결단을 내려서 뭔가 일이 진척되었다는 식의 전개가 아니라 각 종족의 수장들이나 주요 인물들이 결정을 내리는 형태로 전개됩니다.

  이 방법을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제시하긴 했지만 분명히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플레이어가 주인공이다라는 식의 경험은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대신 인물 간의 관계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그쪽으로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에 두번째 방법보다는 전달력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격전의 아제로스

    플레이어는 무수히 많은 시련에서 아제로스를 구한 영웅인 것 같지만, 실제론 그 모든 결정은 플레이어가 직접 내린 것이 아니라

    각 종족의 수장이 내린 것입니다. 이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어떤 감정이나 결정권도 가지지 못하고 주어진 임무만을 수행합니다.

    어떤 면에선 두번째 방법과 유사하지만 감정 표현이나 갈등의 주체가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점이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마치며

  사실 흔히 말하는 '게임성(게임다움, 놀 수 있는 거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가장 이상적인 것은 감정도 표현할 수 있고 거기에 따라 스토리나 콘텐츠가 달라지는 첫번째 방법이 가장 좋아보입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약 5년차의 경험과 이 게임 저 게임을 해보며 느낀 바가 있다면 '선택에 따른 분기를 제공하는 것이 항상 즐거운 경험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시를 몇 가지 들자면 CD 프로젝트 레드에서 출시했던 쓰론 브레이커의 경우, 커다란 분기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보상의 차이를 결정하는 다양한 선택지가 등장합니다. 처음 이 게임을 접했을 때에는 이점이 대단히 게임스럽고 고르는 맛이 있어 좋다고 느꼈지만 플레이가 하루 이틀 계속 이어지다보니 선택지를 고르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피곤했습니다. 그저 정해진 스토리를 편히 감상하고 싶었죠. 또한 세키로나 블러드본과 같은 게임들처럼 선택지에 따라서 보스의 유무나 엔딩이 달라지는 경우는 보지 못한 엔딩을 위해 다시 하기에는 부담스럽고, 포기하자니 어쩔 수 없이 손해를 봐야 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썩 즐겁진 않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100% 모든 콘텐츠를 즐겨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 많은 것을 다시 해야하는 부담감이 존재합니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중간부터 시작할 수 있는 많은 플레이 포인트를 제공했지만 그럼에도 부담은 줄어들지 않죠. 그런 모든 분기를 경험하는 유저는 소수라는 사실은 플레이스테이션에서 제공하는 플레이어의 트로피 보유현황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분기까지 모두 플레이 하는 플레이어는 25%가 채 안 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피곤하니 선택지를 무조건 덜어내야만 하느냐라고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격전의 아제로스의 호드의 상황처럼

가치관에 따라 대단히 큰 이견 차이를 보이게 되는 경우선택지를 제공하지 않았을 때 큰 불쾌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게임의 경우는 결국 플레이어들의 성화에 실바나스를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라는 선택지를 제공했습니다. 이 선택지들이 종국에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인지는 확장팩의 끝을 봐야겠지만, 일단은 퀘스트 1~2개 및 대사 분기 처리라는 유의미한 결과를 제공하여 플레이어들에게 만족감을 주고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3가지 중에 정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게임의 방향성, 타겟층, 장르, 플레이 피로도, 서사 상황에 따라서 각 방법들을 적절하게 선택하여 적용해야 합니다. 서사는 효과적으로 전달하면서 플레이어의 인지 괴리감은 최소화하고 그들이 선택하지 못했을 때 불쾌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적절하게 유의미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 이것이 정답이 아닐까요?


※ 쓰론 브레이커

    이 게임에서는 정말이지 끝없이 무수히 많은 유의미한 선택지가 등장합니다. 게임 초반에는 이점이 매우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으로

    다가오지만 플레이가 지속될수록 '또 선택지야?'라는 식의 피로감이 쌓여갑니다. 선택지를 주는 것이 항상 좋은 경험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