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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창고/레벨 디자인

레벨의 완급 조절

1. 시작하기 전에

  레벨 관리가 잘 안된 게임이나 초심자의 레벨을 보면, 보통 피처 크리프이거나 정반대로 너무 밋밋한 레벨인 경우가 많은데,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인지 개발 경험을 토대로 고민해 보니, 게임의 전체적인 레벨 완급을 조절하지 못해서 발생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레벨의 완급 조절이라는 것에 대해서 가볍게 살펴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스타워즈의 러닝타임에 따른 텐션 그래프. 이 그래프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설명하고 있다.



2. 흐름 : 한편의 영화이자 게임

  제가 주니어 레벨 기획자에게 주로 강조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영화감독이 되었다고 생각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영화 제작에는 배우로 시작하여, 무대 연출, 각본가, 카메라 감독 등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데, 여기서 영화감독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영화감독은 영화의 큰 흐름과 방향을 정하는 선장입니다. 그는 긴 러닝 타임 동안 관객이 지루하지 않게, 어디서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하며, 어디서 관객의 눈과 심리가 쉴 수 있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머릿속에는 영화의 흐름이 관객의 감정선을 따라서 그래프처럼 펼쳐져 있을 것입니다. 이 그래프를 얼마나 잘 만들어 실제로 반영하는지에 따라 영화를 보는 관객의 경험은 크게 달라집니다.

 

 

  다시 게임 이야기로 돌아와서, 레벨 기획을 보스나 맵 제작 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히는 게임의 플레이 흐름을 만드는 일입니다. 레벨 기획자는 긴 플레이 타임 동안 플레이어가 지루하거나 지치지 않게 게임의 흐름을 조율하는 일을 수행하는 데, 이것이 마치 영화에서 영화감독이 하는 일과 유사합니다. 다시 말해서, 레벨 기획자는 플레이어라는 관객이 게임 레벨이라는 한 편의 영화를 플레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완급 조절 실패

  그렇다면, 서두에서 말했던 강약이 잘못된 레벨은 무엇일까요? 가령, 우리가 어떤 영화를 관람했는데, 소재나 각본, 연출의 퀄러티를 제외하더라도 영화 관람이 지치거나 혹은 지루했다면 문제는 무엇일까요? 이 경우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완급 조절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동일 선상으로 게임 퀄러티는 좋은데 플레이가 뭔가 지치거나 지루하다면, 이 역시 완급 조절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이 완급 조절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이번엔 그림으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관객의 경험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완급을 조절한다는 측면에서, 전 개인적으로 게임 레벨, 영화, 음악, 그림이 모두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총 세 개의 그림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모든 요소가 자신이 뛰어나다고 주장하고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완급 조절 없이 모든 곳에 힘을 준 경우인데, 그러다 보니, 관객은 이 그림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모든 것 중요한 요소로 보이다 보니, 관객의 입장에서는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전체를 꼼꼼히 살피게 되니, 과한 긴장감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큰 피로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작품을 끝까지 감상하지 않은 채 포기하게 됩니다.

 

 

반대로 두 번째 그림은 뭔가 많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많이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것은 없습니다. 직전의 그림이 온통 자신이 뛰어나다며 외치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그 누구도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는 상황입니다. 이 경우, 관객은 작품에서 그 어떤 감정이나 경험의 자극을 받지 못하므로, 금세 흥미가 떨어져 감상을 포기하게 됩니다.

 

게임 레벨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임 레벨에서 전자는 보통 열정이 넘치는 초심자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유형인데, 레벨을 만들 때 열정이 지나쳐서 모든 곳을 학습이 필요한 어려운 전투나 퍼즐로 가득 채우다 보니, 플레이어에게 쉴 틈이 없어 과한 피로감을 유발합니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어떤 기획자는 모든 것을 너무 무난하게 만들어서 플레이어가 시간은 많이 소비하는데 그 어떤 감동이 없는 레벨을 만들기도 합니다.

 

 

4. 강약 조절

  이번엔 이 그림을 한번 보겠습니다. 

 

 

심미안이 없는 사람도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앞선 그림들보다 훨씬 집중이 잘 되고 안정감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연 완급 조절, 즉, 힘을 줄 때는 확실히 주고 뺄 곳은 확실히 뺏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물은 중앙의 팔을 뻗은 흑발 여성입니다. 그녀는 중앙을 확실히 차지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인물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더 세밀한 묘사와 짙은 색상으로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반면, 주변 인물이나 배경은 그녀에 비해 차지하는 공간이 작고, 묘사가 떨어져 그녀가 돋보일 수 있도록 보조합니다. 즉, 관객의 눈이 머무르고 감명받기 위한 지점은 명확히 제시해 주면서,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눈이 확실히 쉴 수 있게 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완급 조절을 게임 레벨에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이때 많은 레벨 기획자가 전투에만 집착하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완급을 조절할 때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완급 조절의 유연성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텐션의 수준을 4로 맞춰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활용할 수 있는 재료가 4개라면, 모든 재료를 1의 수준으로 놓거나, 하나만 4로 놓는 등 유연성이 매우 높아지지만, 만약 재료가 2개밖에 없다면 두 재료를 모두 1로 놓을 수 있는 선택지는 없어지기 때문에, 그만큼 유연성이 줄어들어 각 재료의 텐션 등락폭이 지나치게 오르내리게 됩니다. 저는 어떤 게임이 전투 난이도가 갑자기 튀거나 갑자기 꺾이는 등의 문제는, 이처럼 완급 조절을 전투로만 조절하려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게임 레벨에는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무수히 많습니다. 마치 영화의 재미에 관여하는 것에는 스토리뿐만이 아니라 액션, 배우, 카메라 구도, 효과 등 여러 요소가 있는 것처럼, 게임 레벨 역시 레벨의 스토리, 이벤트 컷신, 적의 외모, 배경의 전환 같은 활용할 수 있는 많은 요소가 있습니다(다시 한번, 레벨 기획자는 자신이 영화감독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실제 게임 사례를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필자가 2017년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상록숲 던전을 분석한 문서의 일부입니다.

 

 

위의 표는 던전 내 다섯 개 구역의 패턴 구조를 표로 정리한 것으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구역 단위로 일반 구간에서 학습한 것이 보스에게 심화하여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구역 초반에 쉬운 난이도의 기본 학습을 제공하고 후반에는 학습한 것을 발휘해야 하는 보스로 강한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다시 새 구역에 진입하면 쉬운 난이도의 학습을 진행하면서 집중력을 떨어뜨려 쉴 수 있게 합니다. 즉, 집중과 학습 겸 휴식을 교차로 제공하는 식으로 완급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구역이 바뀌면 핵심 패턴의 변화를 줘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가 중반부에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고, 음악이 2절에서 가사의 변화가 생기는 것처럼, 이 레벨 역시 변화를 주어 지속적인 흥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던전은 구역 당 10분 정도의 플레이 타임을 요구하는데, 이 던전의 레벨 기획자는 너무 잦은 변화로 플레이어를 피로하지 않게 하면서도 지루하지도 않은 타협점으로 10분의 플레이 타임을 선정한 것입니다.

 

 

앞서 레벨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전투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이 표는 그것을 잘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이 던전은 구역마다 새로운 비주얼과 스토리를 제시합니다. 첫 번째 구역에서는 토착생명체 위주의 몬스터와 순찰을 도는 거대 몬스터로 매우 원시적인 비주얼을 제공하여, 위험 투성이 미지의 땅에 발을 내딛는 경험을 제공하지만, 두 번째 구역에서는 거대 몬스터가 없어지고 자연에 침식된 오크를 보여주면서 비주얼의 변화와 함께 이들 생명체가 단순히 위험한 게 아니라 감염을 일으킨다는 스토리를 제공합니다. 이처럼 구역이 바뀔 때 전투 경험 외 변화를 추가하여, 전투 패턴 학습을 위해 난이도를 낮춰 전투의 텐션이 떨어졌더라도 다른 방면으로 재미를 보완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전투로만 텐션을 잡으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음 구역의 초반 구간으로 들어섰는데 전투가 너무 쉬워 심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아마 그 구간의 전투 난이도를 올리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보스전을 진행하여 과한 피로감을 가진 플레이어에게 충분히 쉴 수 있는 틈을 주지 않은 채 다시 집중을 요구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5. 마치며

  '흐름을 봐야 한다'라는 말은 글로 쓰고 입으로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려 하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레벨에 활용할 수 있는 여러 요소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다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배치하는 레벨 기획자는 그것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영화감독으로써 레벨 기획자는 전투뿐만이 아니라, 배경 및 객체의 비주얼, 서사, 사운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며, 필요하다면 유관 부서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다음의 말을 강조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레벨 기획자는 영화감독이 되어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