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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창고/레벨 디자인

레벨 컨셉팅 가이드

1. 시작하기 전에

  게임을 하다 보면 직업 때문인지 레벨을 주의 깊게 보는데, 안타깝게도 인상에는 남지 않는 컨셉이지만 최적화에도 불리한 곳들을 만나곤 합니다. 레벨(혹은 배경, 맵)은 캐릭터에 비해서 시선을 사로잡지는 않지만, 역설적으로 캐릭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기기 퍼포먼스를 요구하는 영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벨 기획자에게는 퍼포먼스를 줄이면서 인상에 남을 수 있는 레벨을 만드는 역량이 요구됩니다. 인상적인 레벨은 그저 프랍을 많이 배치하거나 크기를 키운다고 해서 탄생하지 않으며, 전자는 최적화가 안된 난잡한 레벨이 되고 후자는 크기만 크고 내부는 휑한 레벨이 될 여지가 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최적화가 잘 되어 있으면서도 인상에 남을 수 있는 레벨 컨셉을 만들 수 있을까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울부짖는 협만

 

 

2. 프랍과 퍼포먼스

  레벨의 컨셉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최적화에 대해 먼저 알아봐야 합니다. 모든 게임 개발 직군이 최적화에 연관되어 있지만, 특히 3D 레벨은 그 거대한 규모 때문에 항상 최적화와 퍼포먼스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므로 이것들을 고려하지 않은 레벨 기획은 있을 수 없습니다. 레벨의 최적화와 퍼포먼스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번 글에서는 컨셉팅과 깊이 연관 있는 프랍(3D 배경 오브젝트)에 연관된 메모리, 복잡도와 크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제가 전문 테크니컬 아티스트(TA)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 메모리

메모리(memory)기억 용량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기가 게임을 구동할 때 얼마나 많은 종류의 그래픽 리소스를 기억할 수 있는지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레벨에 서로 다른 100개의 프랍이 있다면 그것을 위한 프랍 100개만큼의 메모리 공간이 필요할 것이며, 만약 메모리가 부족하다면 게임은 크래시가 발생하는 등 강제 종료되거나 심각한 프레임 드랍을 발생시킬 것입니다.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프랍을 다양하게 쓸수록 레벨이 차지하는 메모리가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럼 레벨을 만들 때는 메모리가 허용하는 최대한 많은 프랍으로 레벨을 제작하면 될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메모리에는 게임 화면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이 들어가야 합니다. PC, NPC, 몬스터 같은 캐릭터는 물론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스킬 이펙트와 사운드, 심지어 각종 시스템의 UI 프레임이나 아이콘까지도 메모리에 포함됩니다. 테크니컬 디렉터(TD)와 테크니컬 아티스트(TA)는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각 요소들을 여러 메모리 장치들에 공간을 배분합니다. 이때 배경은 우선도 후순위에 속하곤 하는데, 유저들은 보통 배경보다는 캐릭터에 더 관심을 가지며, 전투에 연관된 스킬 및 몬스터와 시스템의 UI는 게임 플레이 측면에서 필수불가결한 영역인 반면에, 배경은 관심 및 중요도에 비해서 차지하는 메모리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프랍을 여러 번 복사해서 배치하는 것은 메모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돌 하나를 100개로 복사해서 배치한다고 해도 메모리에서는 1개로 인지합니다. 이 개념이 다소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는데, 최대한 간단히 설명하면 메모리는 하나하나의 개체를 기억하는 역할을 하고, 복사된 100개를 우리가 보는 화면에 보여주는 것은 다른 컴퓨터 부품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개념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깊이 들어가면 Vram이니 램카드니 등 복잡해지지만 이 글에서 알아야 될 영역은 아닙니다.

 

나. 복잡도와 크기

복잡도는 프랍이 얼마나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지를 말합니다. 이번에는 이해하기 쉽게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사람도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냉장고 박스와 아름답게 장식된 손가방이 있습니다. 이 둘 중에서 더 많은 퍼포먼스를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크기가 거대하면 더 무거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정답은 장식된 손가방입니다.

컴퓨터는 3D 물체를 면(Tri, Polygon)의 집합으로 인지합니다. 즉, 물체가 더 많은 면을 사용할수록 더 많은 계산을 해야 하는데, 냉장고 박스는 6개의 면만 있으면 되는 반면에 장식된 손가방은 어떻게 제작하느냐에 따라서 수십수백 개의 면을 계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퍼포먼스를 측정하는 데에 있어서 3D 물체의 크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원룸 하나를 채우려고 할 때 냉장고 박스는 몇 개 넣지 않아도 순식간에 공간이 없어지겠지만, 장식된 손가방은 수천 개를 쌓아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냉장고 박스가 훨씬 퍼포먼스를 적게 요구하기 때문에, 냉장고 박스가 들어간 원룸과 손가방이 쌓여있는 원룸을 서로 비교하면 전자의 원룸이 터무니없이 빠른 퍼포먼스를 보여주게 됩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복잡도에 있어서는 크고 단순할수록 퍼포먼스에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3D 그래픽에 관하여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퍼포먼스를 결정짓는 훨씬 더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이번 글에서는 이 정도만 인지해도 괜찮습니다. 

 

 

 

3. 레벨 컨셉팅 가이드

  인상에 남지 않는 게임 레벨들은 대체적으로 비슷한 외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환경에 크기가 커봤자 얼마 크지도 않은데 구조는 복잡한 프랍들, 심지어 이 프랍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데 구조는 또 다 달라서 저마다 메모리를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곤 합니다. 추측건대 이런 레벨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사람은 익숙한 것에 더 친숙한데 평상시에 우리의 관찰 범위는 눈높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람과 나무를 함께 그리라고 하면 보통 나무의 높이를 사람보다 약간 더 크게 그리곤 합니다. 실제로 나무는 건물 2~3층 높이인데도 말이죠.

레벨이라는 거대한 환경을 만드는 레벨 기획자는 시야를 더 크고 넓게 봐야 합니다. 그래서 레벨 기획을 할 때는 가장 큰 것에서 시작하여 작은 것으로 점차 내려오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레벨을 기획할 때 규모에 따라 6가지의 핵심 요소를 세우고 시작하는데, 그것은 바로 분위기, 공통 환경, 랜드마크, 대형 프랍, 동적 프랍, 포인트 프랍입니다.

 

가. 분위기(무드)

우리가 새로운 장소에 들어섰을 때 제일 처음 느끼는 첫 번째 인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그곳의 분위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1차원적인 인상으로, 각 장소들은 인물이나 프랍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분위기 하나만으로도 그 환경 전체의 전체 인상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분위기를 결정짓는 것은 날씨(또는 대기 환경)시간(또는 밤낮 변화)입니다. 이 두 가지가 변경되면 우리는 모든 것이 동일한 레벨이라고 하더라도 어떨 때는 매우 밝고 경쾌한 장소라고 생각하다가도, 반대로 온몸이 움츠러드는 음산한 분위기를 느끼기도 합니다. 회화로 예시를 든다면 밑 색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밑 색을 무엇으로 까느냐에 따라서 그 위에 올라갈 그림들이 방향이 모두 바뀌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만큼 레벨의 분위기는 레벨의 인상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 가장 신중해야 할 첫 번째 키워드입니다.

저는 보통 분위기를 판단할 때는 약간 흐릿한 눈으로 그 장소를 봤을 때 느껴지는 인상으로 판단하고는 하며, 어떤 분위기로 가야할지 결정할 때는 그 레벨에서 벌어지는 게임 플레이가 유저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경험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레벨에서 진행되는 게임 플레이가 서사적으로 신비로운 느낌을 줘야 하며 어떤 마법적인 것과 관련이 있고, 감정적으로 쳐지는 느낌이라면 약간 무거운 푸른빛이나 보랏빛으로 분위기를 잡는 것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콜다라 : 마법, 푸른용의 몰락 등을 상징

 

나. 공통 환경

공통 환경은 쉽게 말하면 레벨의 틀을 구성하는 지형 기반 그 자체를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보통은 공통 환경이 곧 자연환경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만약 레벨이 외부 환경이 아니라 거대한 건물 내부라면 건축 양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즉, 말 그대로 레벨의 틀을 이루는 그 장소 자체의 모습입니다.

 

게임을 개발할 때 공통 환경은 자연환경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는 단순히 설정적으로 우리 삶을 이루는 대부분의 장소들이 자연환경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개발에서도 더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종류의 프랍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만큼 많은 시간과 메모리 용량을 요구하므로, 레벨을 제작할 때는 최대한 적은 종류의 프랍을 최대한 많이 복사해서 배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같은 것을 복사하는 것으론 메모리가 늘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때, 자연환경(나무, 돌, 물)은 형태가 불규칙하여 형태가 기억에 남기 어렵기 때문에 유저가 눈치채기 어려운 반면에, 건물이나 석상과 같은 인공물은 구조가 명확하여 기억에 남기 쉬우므로 유저들이 쉽게 눈치챌 수 있어 게임에 좋지 않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인공물도 기억에 잘 남지 않도록 덜 특징적이게 디자인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것은 매우 도전적이고 달성하기 어려운 작업입니다(그래서 인공물 위주의 환경을 최대한 적은 메모리로 밀 도있게 채울 수 있는 사람일수록 실력 있는 레벨 기획자, 아티스트라고 인정받기도 합니다).

 

분위기와 공통 환경이 바뀌어야만 하는 경우는 지역의 지리적 위치가 바뀌었거나 그만큼 게임 플레이와 서사가 극적으로 바뀌어야만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다익선의 함정에 빠진다면 메모리 문제로 게임 퍼포먼스는 급격히 하락할 것입니다.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은 게임은 결국 게임 플레이를 위해 하는 것이지 멋진 비주얼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적화를 놓친다면 게임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의 몽환숲 : 전체적인 공통 환경 느낌

 

다. 랜드마크

아마 랜드마크라는 회화나 영화 등에서 수없이 들어본 단어일 것입니다. 이것은 사전적 의미로 어떤 지역을 대표하거나 장소를 구별할 수 있는 표지라는 의미로, 비유하자면 지역의 얼굴이자 기억의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지역을 여행하는 어느 탐험가가 이전에 방문했던 지역을 떠올릴 때 '아, 무엇이 있었던 어떤 지역!'이라고 가장 먼저 떠올리는 대상입니다. 제가 레벨을 기획하면서 랜드마크를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규모감, 서사, 첫인상 만들기 총 세 가지입니다.

 

규모감은 랜드마크의 세세한 형태나 배경 이야기를 몰라도 그저 그것 자체의 존재감, 크기만으로도 압도되는 경이로움을 말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주로 우리의 키 혹은 그보다 아래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보다 크기가 훨씬 큰 것은 잘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규격을 벗어난 거대한 조형물을 보면 강렬한 인상을 받곤 합니다. 이처럼 랜드마크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큰 것만으로도 사람은 그것을 기억에 오래 남기곤 합니다.

랜드마크가 사람들의 기억에 확실히 각인되려면 극적인 서사가 필요하곤 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위인전이나 신화 속 영웅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그들의 극적인 삶의 서사에 이입하고 매료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에는 절경을 가진 절벽이 무수히 많이 있지만 그런데도 우리가 낙화암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역사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그곳이 백제가 멸망할 당시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고 하는 서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는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레벨도 다르지 않습니다. 잘 만든 랜드마크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처음으로 보여줄 때 뇌리에 남도록 연출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출이 항상 컷신이나 영상과 같은 시네마틱 연출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레벨 기획으로 봤을 때 랜드마크로 이어지는 동선을 그것과 마주한 순간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동굴 속을 헤매다가 야외로 빠져나왔을 때 한 번에 눈에 들어오게 한다거나, 끝없는 오르막길을 올라가다가 정상에 올라선 순간 탁 트인 원경에 랜드마크가 드리우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반드시 이런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레벨의 구조상 규모감을 주기 어렵거나 서사가 없이 환경 자체에 녹아들 거나 동선 구조상 첫인상 만들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랜드마크가 최대한 인상에 남도록 연출하는 것뿐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말드락서스 : 랜드마크 역할의 시초자 석상

 

라. 대형 프랍

레벨에 분위기, 공통 환경, 랜드마크까지 배치됐으며 이것으로 사실상 필수 요소는 모두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인상적인 레벨을 만들기에 충분할까요? 우리가 경험했던 수많은 게임 중에서 크기가 매우 거대했지만 허전했던 레벨들을 떠올려보면, 그것들은 보통 레벨이 매우 거대하고 어딘가 비어 보인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들일 것입니다.

 

레벨을 제작할 때 그 공간이 얼마나 휑하냐 가득하냐를 표현할 때 보통 밀도가 있다 혹은 없다는 형태로 이야기를 합니다. 밀도가 높을수록 빈 공간이 없이 가득 차 심심하지 않고 다채로워 보이며, 밀도가 낮을수록 공간에 비해 빈 공간이 많아서 휑하고 미완성 같은 인상을 갖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높은 밀도가 높은 메모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밀도가 낮은 레벨이 오히려 메모리를 더 많이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걸까요? 앞서 최적화에서 예로 들었던 냉장고와 손가방의 사례에 정답이 있습니다. 초심자는 레벨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소형 프랍을 배치하려 하고는 합니다. 이를테면 꽃, 나무상자, 수레 같은 것으로, 우리가 평상시에 우리 눈높이에서 익숙하게 봤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오밀조밀한 것을 아무리 배치해도 수백수천 미터의 레벨을 채우기에는 역부족이며, 같은 것을 너무 자주 배치하자니 너무 반복적으로 보이고 다양하게 배치하자니 메모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레벨의 밀도를 올리기 위해서 냉장고의 사례처럼 크기가 크고 형태가 단순한 프랍을 먼저 결정하고 배치해야만 합니다. 이때 유의해야 하는 것은 프랍 하나를 여러 곳에 복사하여 배치할 것이므로 너무 특징적인 것으로 기획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레벨에 있는 대형 프랍과는 명확히 구별이 되는 컨셉으로 기획되어 이 레벨만의 특징으로 자리 잡혀야 합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말드락서스 : 뾰족한 형태의 터레인과 말드락서스 특유의 건물

 

마. 동적 프랍

대형 프랍이 배치되어 우리의 레벨은 이제 밀도 있는 레벨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생동감이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아직 뭔가 부족합니다. 생동감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살아 움직인다는 듯한 느낌입니다. 우리가 만드는 레벨은 그저 평범한 연극의 무대가 아니라 진짜 살아 움직이는 세계 그 자체입니다. 유저들은 자신을 대변하는 캐릭터로 데이터의 집합 덩어리를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세상을 탐험하길 원합니다. 따라서 레벨은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줘야 합니다.

 

밖으로 나가서 주변을 살펴보면 세상은 온통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과 나무, 어디론가 이동하는 사람들과 자동차, 사람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는 고양이, 하늘을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 우리가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수많은 움직임들이 이 세상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레벨 기획자 역시 자신이 만드는 레벨에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을 수 있을지 고민하여 추가해야 합니다. 게임 사운드 업계에는 인지하지 못하는 사운드가 가장 좋은 사운드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면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레벨에도 역시 적용되는 이야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단어를 프랍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꼭 사물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흐르는 물이나 폭포일 수도 있고 바람에 거침없이 휘날리는 깃발일 수도 있지만 할 일 없이 거리를 거니는 고양이나 유저를 따라다니는 강아지, 화들짝 놀라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둘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랑사가의 세상의 끝 : 신의 권좌를 둘러싼 고리가 계속 회전하고 있다.

 

바. 포인트 프랍

거의 모든 구성이 끝난 지금이야말로 용의 눈에 점을 찍는 화룡점정의 순간입니다. 지속적으로 언급했듯이 우리가 평상시에 자주 접하는 것은 눈높이 혹은 그 아래에 있는 사물입니다. 따라서 이 지점에 이 레벨만의 독특한 어떤 것을 만들어 준다면 그것은 순식간에 레벨에 들어온 유저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포인트 프랍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다른 레벨에서는 볼 수 없는 이 레벨만의 독특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지역 서사와 연관되면 가장 좋으며 다소 판타지적이어도 괜찮습니다. 두 번째는 매우 눈에 띄는 것인 만큼 너무 과하게 배치하지 않고 정말 중요한 위치에 강렬하게 배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 사방에 힘을 주면 오히려 포인트가 아니라 노이즈가 낀 듯한 난잡한 인상을 남길 뿐입니다. 그러니 유저의 동선을 기준으로 경험의 곡선을 그리며 경험에 환기가 되어야 할 위치에 의도적으로 배치합니다.

 

리니지2 레볼루션의 채집던전 : 채집물인 약초가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도록 제작됐다.

 

4. 레벨 안의 세부 컨셉

  여기까지 이해했어도 좋은 레벨을 만들기에는 충분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단계 더 멀리 나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레벨은 하나의 큰 틀 안에 여러 가지 작은 세부 구역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한 지역에는 선량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있는가 하면 야생동물들이 거니는 야생 지대가 있을 수도 있고 그 끝에는 여행자들을 습격하는 도적단의 본거지가 있을 수도 있는 법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도대체 레벨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까요? 모든 구역을 위의 기준에 맞춰서 모두 개별적으로 만들면 되는 걸까요?

저는 이런 경우 세부 컨셉 구역의 중요도에 따라 위의 6요소의 단계를 구분하여 나누곤 합니다. 위에서 예시를 든 것처럼 한 지역 내에 있는 마을이나 도적단 본거지 정도의 중요도와 크기를 가진 곳이라면 분위기, 공통 환경, 랜드마크는 공통으로 가져가고 대형 프랍, 동적 프랍, 포인트 프랍을 나눕니다. 왜냐하면 분위기, 환경, 랜드마크는 단기간에 변화될 수 없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되기 때문입니다(다르게 말하면 그런 것을 바꿀 정도로 거대한 개연성이 있다면 바뀔 수도 있겠지요). 반면에 그보다 하위 단계에 있는 요소들은 그곳에 살고 있는 생명들이나 지역 서사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주택이 들어서거나 파괴될 수도 있으며 야생동물들로 인해서 생긴 보금자리가 생기거나 파괴됐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세부적인 것들을 잘 구분해 주면 큰 틀에서는 같은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유저에게 인지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곳에 왔다는 인식을 확실히 줄 수 있습니다.

 

원신의 몬드 : 같은 분위기, 공통 환경, 랜드마크를 공유하지만 대형 프랍 이하 요소를 변경하여 다른 공간을 연출

 

 

5. 타게임 레퍼런스

  설명만 들어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감이 잘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게임을 예시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현존하는 게임 중에서 레벨을 가장 잘 만든 게임은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라고 판단합니다. 이 게임은 제가 레벨 기획을 공부할 때 지침이 되어줬던 게임이면서, 세계적으로 가장 인정받는 MMORPG이니 가장 적절한 레퍼런스가 아닐까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사례를 설명하기 위해서 리치왕의 분노 확장팩에서 나왔던 울부짖는 협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분위기 및 공통환경

울부짖는 협만이 위치한 노스랜드 대륙은 극지방에 위치한 장소로 이것을 알 수 있도록 하늘에는 오로라가 드리워져 있으며 뾰족뾰족한 침엽수림 위주의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원시 비룡을 타고 하늘을 누비는 브리쿨이라는 종족이 거주하는데, 그들의 모험적이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주듯 너무 어두침침하지 않은 맑고 쾌청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랜드마크

울부짖는 협만의 랜드마크는 지역 중앙에 우뚝 솟은 우트가드 성채입니다. 이 지역 브리쿨의 수장이 살고 있는 이 성채는 거대한 계곡 한가운데에 위치해있는데도 하늘 높이 솟아 있으며, 울부짖는 협만 거의 모든 지역에서 그 모습이 보일 정도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합니다.

 

대형 프랍

이 지역은 토착 세력인 브리쿨과 함께 새로 유입된 세력인 얼라이언스와 호드(포세이큰)이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역 곳곳에는 이들의 거대한 건축물들을 만날 수 있는데, 혹시라도 탐험 중 이들의 건물을 마주친다면 그들의 영역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소속과의 관계에 따라 긴장감 혹은 안도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동적 프랍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레벨의 강력한 매력 포인트 중 하나는 생동감 넘치는 환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울부짖는 협만을 거닐다 보면 영역 다툼을 하거나 가족 단위로 이동하는 엄니 멧돼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들을 사냥하는 늑대 역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날이 갈수록 커지는 언데드 스컬지의 위협을 피해 어디론가 떠나는 피난 행렬 역시 마주칠 수 있습니다.

 

포인트 프랍

서사적으로 호드(포세이큰)은 언데드 스컬지를 무력화할 수 있는 강력한 역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주둔하고 있는 곳을 방문하면 거의 모든 곳에 역병을 연구하는 마차나 실험대, 오염된 물 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투스카르라고 불리는 이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수렵 민족으로 주로 물고기를 사냥하는데 이들이 있는 곳에 방문하면 눈에 띄게 많은 낚시 도구들이나 거대한 물고기들의 뼈를 볼 수 있습니다

 


6. 마치며 : 기준은 기준일 뿐

가끔 실무에서 작업을 리드하다보면 이런 기준을 제시했을 때 거기에 너무 맞추려고 하다보니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필요한 것까지 추가하는 경향이 발견될 때가 있습니다. 일할 때 기준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지만 거기에 너무 목 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 6가지를 제시했다고 해서 모든 레벨에 그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 각각이 어떤 역할과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고 자신이 만드려는 레벨에 필요한 것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도록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디 이 글이 레벨 기획을 지망하거나 현재 레벨을 제작하고 있는 많은 분들께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