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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창고/레벨 디자인

[연구] 레벨 기획 발상법

1. 시작하기 전에

어떤 작업이든 새롭게 시작할 때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지 막막하기 마련입니다. 특히 레벨 기획은 고려해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닐 뿐만 아니라 엮여 있는 다른 콘텐츠가 많아서 자주 난관에 빠지곤 합니다.  저 역시 여러 레벨을 기획했지만 매번 새로운 레벨을 기획할 때마다 막막함을 경험하며 두서없이 이 방향, 저 방향을 헤메다가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뒤엎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다가 연차가 쌓이고 후임 레벨 기획자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그분들에게 레벨 기획 피드백을 드릴 때 '나는 비록 이리저리 부딪히며 작업했더라도 피드백을 줄 때는 방향이 흔들리지 않도록 건설적인 피드백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효율적인 작업과 더 설득력 있고 좋은 레벨을 만들기 위해 부딪혀야 했던 요소들을 정리해보고, 그것들을 어떤 순서로 어떻게 발상했을 때 효과적인 레벨이 나올 수 있었는지 정리해보려 합니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용맹의 전당 던전

이 글의 마지막에 예시로 살펴볼 던전입니다. 이런 멋진 레벨을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발상해야 할까요?

 

 

2. 고려해야 할 요소

  먼저 레벨을 발상할 때 고려해야 하는 요소들이 무엇이 있고 각각의 것들은 세부적으로 무엇을 더 고려해야 하는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다양한 요소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단위로 구분했을 때 고려해야 하는 요소로는 서사, 환경, 동선, 플레이 패턴, 공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하나씩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서사Narrative는 다른 연구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일관성 있는 사건의 연속입니다. 그렇다면 레벨에서의 서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레벨의 서사란 그 레벨에서 일어났던 혹은 일어나려는 사건으로 시나리오 파트에서 넘어온 레벨의 배경 설정과 레벨에서 진행될 게임의 이야기 전개를 말합니다. 장르마다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레벨은 게임 플레이의 배경, 이를테면 연극이나 전쟁 놀이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진행될 서사를 밑바탕으로 모든 것들이 파생되어야 합니다.

이때 이 서사는 게임 세계의 스토리(주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온라인 게임의 경우는 플레이어 간의 상호작용으로 벌어지는 멀티플레이 시나리오(공성전, PVP)일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서사를 게임 스토리로만 한정짓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간단히 예를 들면 전자의 경우는 주인공이 숲을 거쳐 강을 지났다면 숲과 강이 레벨에 있어야 하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성문 전투가 이루어진 후 광장 전투가 이뤄진다 라고 하면 성문이 있는 레벨과 대규모 PVP가 이루어질 광장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죠.

 

환경은 레벨의 자연환경이나 사회환경을 이야기 합니다. 일반적으론 서사 단계에서 지정되어 있습니다(앞선 예시 중 숲과 강이 있다거나). 환경 요소와 관련된 것들을 조금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자연물이 많은지 인공물이 많은지부터 시작해서 평원인지 사막인지의 지형이나 위도 정보와 외부인지 내부인지의 공간 설정, 밝은 곳인지 어두운 곳인지에 따른 밝기 정보까지도 포함됩니다.

레벨이 어떤 환경을 기반으로 하냐에 따라서 플레이 패턴이 변화하거나 게임 플레이의 개연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계곡 환경인 경우 절벽이 많고 물이 흐르는 장소가 될 것이며, 이 경우 서사에서는 험난한 계곡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전개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절벽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거나 높은 바위 턱을 오르는 플레이 패턴이 생길 수 있고, 적 개체는 호랑이나 사자보다는 독수리 같은 비행형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겠죠. 일반적으론 대부분의 기획자들이 환경 요소까지는 생각을 잘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지리에 대한 기반 지식이 필요하고, 심미안이 필요하기 때문) 레벨 기획 시 가장 골머리를 앓게 되는 요소 중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동선은 서사 및 플레이 시나리오 기준으로 레벨의 시작부터 끝까지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를 정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레벨 기획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플레이어들의 불편함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레벨 요소이기도 합니다. 동선은 불편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길지도 혹은 짧지도 않게 구성해야 하는 미묘한 작업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고속도로를 떠올릴 수 있는데,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가급적이면 최단 거리로 길을 뚫어 놓는 것이 보통이지만 계속 직선으로만 달리면 지루함이 발생하여 졸음 운전의 위험이 있으므로 필요에 따라 커브 길을 추가하기도 합니다. 게임의 동선도 비슷한 맥락인 것이죠. 이렇게 단순히 이동 방향을 정하는 것 외에도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지 않게 한다거나, 매 이동 구간이 지루하지 않도록 다양한 플레이 요소를 넣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Level Design for Games라는 해외 레벨 기획 원서에서는 10초(30초 였는지 기억이 잘...!) 이상 아무 변화도 없다면 잘못된 것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격언이 있습니다.

 

  플레이 패턴서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어떻게 플레이어블한 것으로 풀어냈는지에 대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서사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에 따라 전투가 벌어질 수도, 도주극이 벌어질수도 있으며 평화롭게 대화하거나 다양한 이동수단을 활용하여 이동만 할 수도 있습니다. 레벨 기획 시 플레이 패턴을 구상할 때는 현재 개발 중인 게임 시스템을 가지고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나열해놓고 무엇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 고려해야 합니다. 배치할 때는 환경이나 서사에 잘 부합할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하며 플레이어가 지루하지 않도록 같은 플레이 패턴이 반복되지 않게 구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령 이동을 계속 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처음에는 달려서 이동했다면 다음에는 점프를 하며 이동을 하기도 하고 그 다음은 기어서 이동하는 등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10초 이상 아무 변화도 없다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죠!

 

  마지막 요소로는 공간이 있는데, 이 요소는 플레이 패턴과 환경에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플레이 패턴이 진행되냐에 따라 크기가 넓거나 좁아야 될 수도 있지만 레벨의 환경이 어떤 환경이냐에 따라 규모적 제약이나 형태의 제약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 패턴이 전투, 특히 보스전과 같은 광범위한 전투로 이루어진다면 일반적인 장소보다 훨씬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반면에 전투 없이 이동이나 대화만 이루어진다면 공간이 넓으면 쓸데 없이 넓은 공간을 제작해야 하는 비효율이 발생하며 플레이어도 방향을 잃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공간과 플레이 패턴은 레벨의 아트적 디테일의 밀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 공간에서 머무는 시간이나 시선 처리 등에 따라서 얼마나 밀도 있는 공간을 구성할 것인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죠.

환경과 관련해서는 '환경에 어울리는 공간'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데, 만약 험준한 협곡 환경을 가진 레벨을 만들기로 했지만 모든 전투 공간을 100m씩 넓게 잡아버린다면 계곡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평탄한 지형만으로 이루어진 레벨이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협곡이라면 응당 좁은 절벽길이나 끝을 모르는 낭떠러지가 주를 이루어야 할 것이며 만약 그런 환경에서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면 환경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봉우리 위에 구성하거나 인공물을 덧대어 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 리니지2 레볼루션의 시공의 균열, 용의 심장 사원

전체적으로 구성을 보면 길과 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길의 경우는 전투보다는 이동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에

공간이 넓지 않은 것이고 ,방은 파티 단위의 대규모 전투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넓은 공간이 필요한 것이죠.

 

 

3. 어떤 순서로 발상할 것인가

  레벨 기획 시 고려해야 할 요소들을 각각 알아보았으니 이제 이것들을 어떤 순서로 어떤 과정을 거쳐 발상하면 좋을지 알아보겠습니다. 발상은 2번 항목에서 언급한 순서대로 서사, 환경, 동선, 플레이 패턴, 공간 순서로 진행됩니다. 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지 하나씩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레벨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 던져진다면 '게임 플레이'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레벨 기획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서사는 그 자체가 게임 플레이 시나리오를 담고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사는 크게 게임 시나리오플레이 시나리오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게임 시나리오의 경우는 게임의 세계관 속에서 벌어지는 서사를 이야기합니다. 보통은 시나리오 기획자가 작성하여 레벨 기획자에게 전달되며 지역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나 지역의 배경 설정과 같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시나리오 기획자가 없는 경우는 레벨 기획자가 작성하기도 합니다). 레벨 기획을 진행할 때는 만드려는 레벨에서 어떤 서사가 있었고 또 진행될 예정인지 정확히 파악해야 하며, 그것들로부터 게임 플레이 경험과 연관되는, 가능한 모든 것들을 '구역' 단위로 정리해야 합니다. 이때 게임 플레이 경험과 연관된다는 것은 직접 플레이 하는 것을 넘어서 시각적인 재미나 세계관 전달에 관한 것도 포함됩니다. 하나씩 예를 들면 플레이와 연관되는 것의 경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격전의 아제로스의 다자알로는 마을의 기능이라는 게임 플레이와 관련되어 있으며 디아블로3 3막에서 아즈모단의 소굴로 들어가는 도중 보게 되는 원경의 구속된 거대 악마는 플레이와 연관은 없지만 존재만으로도 시각적인 위압감을 선사합니다. 또한 위쳐3의 노비그라드 앞 검문소의 경우, 플레이에 직접 연관은 없지만 전쟁통을 피해서 노비그라드 시내로 들어가려는 피난민들과 그런 그들을 막아서는 경비대를 보여주면서 노비그라드 인근의 사회적 상황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게임 플레이 시나리오의 경우는 게임 플레이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어느 정도는 뒤에서 언급할 요소인 플레이 패턴과 중복되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이 단계에서 고려할 것인 패턴을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큰 그림'이 필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곳이 PVP 전장이 될 것인지, 1인 혹은 5인용 던전이 될 것인지 혹은 오픈 필드가 될 것인지부터 시작해서 PVP 전장이라면 전체적인 전투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이야기합니다. 공성전 콘텐츠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플레이 패턴에서 구성하는 것은 어떤 공성 무기를 어떤 용도로 조작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이라면 플레이 시나리오에서는 공성전이 진행될 때는 제일 먼저 공성 무기를 활용한 외성문 전투가 이뤄지고, 그 다음에는 거점을 점령하기 위한 내성문 전투, 다음은 왕좌를 얻기 위한 왕좌 전투가 진행된다 정도의 큰 그림인 것이죠.

 

  서사의 흐름과 거기에 필요한 구역들이 파악되었다면 다음은 그 서사가 전개되는 레벨의 환경, 즉 지리, 생태계, 사회를 파악해야 합니다. 아마 많은 기획자가 2번째 순서로 고려해야 하는 것이 환경이라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데, 제가 겪은 바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포인트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일부 장르의 게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게임의 레벨은 기반이 되는 환경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슈퍼 마리오도 마찬가지이죠. 다른 고찰이나 이 글의 앞 부분에서도 누차 이야기하였듯 레벨은 수준이나 단계를 넘어서 연극의 배경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어떤 레벨을 플레이 하기 앞서서 레벨은 그것이 의미하는 환경다운 환경을 갖춰야 플레이어가 위화감을 갖지 않고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작하려는 레벨이 평원이나 언덕이라면 굴곡이 크지 않은 평탄한 지형이 되어야 하며, 험난한 산비탈이라면 많은 나무, 바위와 울퉁불퉁하고 거친 길을 가져야 하며, 시가지라면 도로와 건물이 있어야 합니다. 환경을 기반한 상태에서 그 외의 것을 맞춰야지, 다른 기반을 다 만들어 놓고 나중에 맞추려고 하면 실제 세상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터무니 없는 지형이 나오거나 이름만 평원이고 산이지 실제 레벨의 생김새는 전혀 엉뚱한 구조를 갖게 될 것입니다. 레벨의 이름은 평원이라고 해놓고 험준한 계곡을 가지고 있다거나 지하수로라고 했지만 수로는 없고 방만 있다거나 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죠.

 

※ 파이널 판타지 14의 이슈가르드 지역

레벨 기획 시 너무 패턴이나 사냥터 크기 같은 플레이 요소에만 집중하다보면 레벨의 환경에 대해 잊기 쉽상입니다.

예를 들어 파이널 판타지14의 이슈가르드는 눈 덮인 고산에 위치한 지역이죠.

때문에 위의 스샷처럼 험준한 절벽, 눈덮인 고산들이 있어줘야 하는데, 이를 망각해버리면 그냥 평탄한 지형이 나오게 됩니다.

 

  서사와 환경은 레벨을 세부적으로 파고 들어가기 전에 미리 알아둬야 할 기반을 마련한 것이었다면, 이젠 게임 플레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3대장, 동선과 패턴 그리고 공간을 만들 순서입니다.

 

  셋 중에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동선입니다. 순수하게 이동하는 선만을 구상했을 때 어떤 경로로 움직이게 될 것인지를 정합니다. 마치 미술에서 인물화나 크로키를 그리는 예술가들이 세세한 디테일을 그리기 전에 그림의 전체적인 동세를 설정하는 것과 결을 함께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 동선을 잡을 때는 서사로부터 발견할 수 있었던 구역들을 이용하여 레벨 다이어그램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합니다. 구역의 이름과 이름들을 연결한 직선으로 이루어진 다이어그램에서는 전체적인 흐름을 잡으면서 연속되는 구역들이 서로 너무 비슷해서 재미가 없는지 등 큰 틀을 잡아 나갑니다. 레벨 다이어그램이 어느정도 마음에 들었다면 세부적인 동선을 잡기 시작합니다. 

보통 동선의 시작은 레벨의 진입지점이 되고 동선의 끝은 다음 레벨로 이어지는 출구가 됩니다. 동선을 잡을 때 중요한 것은 불필요한 이동구간을 줄이고, 지루하지 않게 방향을 변칙적으로 하면서 왔던 길을 최대한 되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길이 너무 복잡하지 않게 해서 헤메지 않게 해야 합니다. 게임에 도전했다가 길을 헤메서 이탈하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레벨을 기획할 때는 재미있는 혹은 대규모 레벨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플레이어가 길을 잃게 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됩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게임의 재미는 콘텐츠 구성이나 시스템에서 나오는 것이지 동선만 재밌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동선은 다른 게임 요소들을 보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소 재미없는 동선이 만들어지더라도 감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플레이 요소가 재미있으면 될테니 동선은 1자로 쭉 빼도 된다는 식의 발상을 해서도 안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기본적인 동선과 서사에 필요한 지역이 정해졌으면 동선을 따라 플레이 패턴을 배치합니다. 어떤 패턴이 어디서 어떻게 전개될 지는 보통 서사 단계에서 정해져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필요하다면 서사에 없는 것을 추가하거나 패턴 변경을 위해서 서사를 수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나리오 기획자는 보통 이야기적인 재미에 집중해서 서사를 구성하기 때문에 서사를 실제로 플레이로 구현하려고 하면 너무 반복적이거나 혹은 플레이 요소는 별로 없이 대화나 연출만 전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레벨 기획자는 서사를 기반으로 플레이 패턴을 설계할 때 서사를 그대로 반영했을 때 플레이어블한 요소가 충분히 확인하고 변경이 필요하다면 독단으로 변경하지 말고 담당 시나리오 기획자와 논의를 거쳐 서사와 플레이 패턴이 게임답게 잘 어우러지도록 해야 합니다.

플레이 패턴의 배치는 레벨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실제로 전 동선보다 이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으로 레벨은 플레이 패턴 배치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플레이 패턴을 배치하여 패턴의 변화를 만드는 것이 곧 레벨(수준, 단계) 기획이기 때문이죠. 배치 시 고려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2개만 꼽자면 학습다양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학습은 플레이어가 활용할 수 있는 스킬과 그것으로 풀어낼 수 있는 다양한 패턴(과제)에 적응하면서 문제풀이의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레벨 기획자라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학습은 기본적인 것이니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지만 다양한 경험이라는 항목은 상당히 깊게 생각해봐야 할 대상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지겨울 수 밖에 없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로, 동선을 따라 진행할 때 똑같은 패턴이 계속 반복되면 게임이 지루하게 되니 끊임없이 새롭거나 혹은 이전에 경험했던 것을 응용한 패턴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는 플레이어블 요소의 변화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배경이나 등장인물의 외관 변화부터 시작해서 서사 전개의 변화, 음악의 변화, 이동방법의 변화까지 매번 무엇인가 변화되었다라는 느낌을 제공하여 플레이어가 지루할 틈이 없도록 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작업, 바로 공간이 남았습니다. 공간을 잡을 때는 이전에 고려했던 모든 것들을 감안하여 너무 넓지도 혹은 좁지도 않은 최적화 된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벨의 환경에 적절한 구조의 공간을 잡아야 함은 물론이며, 기준 동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하면서 플레이 패턴에 잘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Level Design for Games에서도 강조했던 것처럼 그 장소의 플레이 타임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단순히 플레이 타임이 길면 크고 짧으면 좁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패턴의 플레이가 진행되냐에 따라서 공간이 좁더라도 플레이타임이 긴 경우가 있고, 플레이타임이 짧지만 공간이 매우 넓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조건을 따지면서 공간의 크기 뿐만아니라 레벨을 얼마나 밀도 있게 만들 것인지, 어떻게 작업량을 줄이면서 효율적으로 제작할 것인지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공간을 잡을 때는 대단히 디테일한 평면도를 그리는 방법부터 3D 프로그램이나 상용 엔진을 이용하여 직접 목업 레벨을 제작하는 것 등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만, 가장 좋은 것은 평면도보다는 3D 프로그램이나 상용 엔진으로 목업(임시 레벨)을 만들고 직접 뛰어 보는 것입니다. 평면도로 100m라고 감으로 잡아보는 것과 100m를 직접 뛰어보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캐릭터 이동속도, 배치될 아트 리소스의 양, 함께하게 될 플레이어의 수 등, 공간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Level Designs For Game에서도 레벨 기획자가 직접 3D 모델링을 해서라도 목업 레벨을 만들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 CGMA라는 해외 교육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레벨 기획 목업 레벨 예제

아직까진 국내에서 목업까지 제작하여 레벨 기획을 하는 사례는 잘 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해외 기획 사이트나 해외 교육 원서를 보면 레벨 기획자가 3D 툴을 이용하여 목업을 만드는 것을 기본 소양인 것으로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래야 시행착오를 많이 줄일 수 있고 보다 실제 플레이 경험에 가까운 기획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죠.

국내 레벨 기획자들도 아직 목업 레벨을 제작할 줄 모른다면 당장 배워볼 필요가 있으며, 장차 이것이 기본 소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예시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그럼 이제까지 알아본 발상 순서를 어떻게 실제로 활용할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게임 레벨들에 적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레벨의 종류는 매우 다양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오픈 필드 레벨은 동선이 일정하지 않고 변수가 많아서 세밀한 조정이 어렵기 때문에 예제로 삼기 어려우므로 동선과 경험을 기획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던전 레벨을 가지고 알아보겠습니다. 예제로는 MMORPG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용맹의 전당' 던전을 골라봤습니다. 용맹의 전당은 군단 확장팩에서 나왔던 던전으로 플레이어가 이 확장팩에서 처음 만날 수 있는 인스턴스 던전 중 하나 였으며 북유럽 신화를 게임에 맞게 풀어낸 던전입니다.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서사입니다. 이 던전의 서사는 플레이어가 아그라마르의 아이기스라는 고대종족 티탄의 유물를 얻기 위해 오딘이라는 강력한 존재로부터 시험을 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오딘이라는 존재는 북유럽 신화의 까마귀 신 오딘을 모티브로 한 인물로써, 외부 위협(여기서는 군단)에 대비하여 브리쿨이라는 종족에서 우수한 전사들을 선발해 용맹의 전당을 만들어 결집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 던전은 오딘의 거처를 지키는 헤임달의 관문, 선발된 전사들이 다가올 전쟁을 기다리면서 술을 마시고 기거하는 봉밀주 전당, 여성 브리쿨들이 발키르가 되기 위해 시험받는 발키르 전당, 전사들이 기술을 갈고 닦고 실력을 경쟁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원한 사냥의 들판,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딘이 거처하고 있는 장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용맹의 전당은 어디로든 신속히 파견될 수 있도록 강력한 마력을 이용해서 하늘 높은 곳에 떠있습니다. 플레이어는 이곳에서 헤임달의 시험을 돌파하고 봉밀주 전당을 거쳐 발키르의 시험 및 사냥의 시험을 완수한 뒤 이 전당에 도달하기까지 끊임없이 경쟁해왔던 타락한 브리쿨, 스코발드를 물리치고 오딘에게 가치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간단히 살펴보긴 했지만 대략 이 정도의 서사가 시나리오 기획자로부터 전달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서사를 통해 파악해야 하는 것은 무엇무엇이 있을까요? 아까 정리했던 발상의 순서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발상의 순서는 '서사, 환경, 동선, 플레이 패턴, 공간'이라고 했었습니다. 전달받은 서사를 읽고 각각의 요소들에 어떤  점을 얻어낼 수 있는지 생각해본 후 아래와 같이 요소 별로 발상, 전개를 시작합니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군단 확장팩에 등장한 '오딘'

북유럽 신화의 까마귀 신 오딘에서 모티브를 따와 만들어진 이 인물은 여러모로 라그나로크를 준비하는 오딘과 같은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먼저 환경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레벨의 세부적인 구역들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전체적인 기후나 지형 등을 파악해봅니다. 서사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늘 높은 곳에 떠있다'라는 것과 '브리쿨'이라는 종족이 있다는 점, '오딘이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즉 이 레벨은 공중에 떠있는 환경이며 브리쿨 양식의 인공물로 이루어졌고, 자연환경이 있다면 브리쿨들이 사는 환경과 흡사할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레벨에 있어야 하는 세부적인 구역들을 얻어내보겠습니다. 게임의 레벨은 플레이를 위해 있는 것이므로 플레이어의 행동 위주로 정리해봅니다. 먼저 플레이어가 용맹의 전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시험할 헤임달의 시험장소가 필요하며, 이 장소가 전사들의 결집 장소라는 것을 보여줄 봉밀주 전당이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플레이어가 본격적으로 가치를 증명할 2가지 시험을 받을 장소로 발키르 전당영원한 사냥의 들판이 있어야 하며, 최종적으로는 경쟁자인 스코발드와 단판을 짓고, 오딘으로부터 최종적인 가치를 증명할 장소가 필요합니다.

구역들을 선발해냈으면 각 구역들이 어떤 환경적 특징을 가지고 있을지 서사에 기반하여 정리합니다. 먼저 헤임달의 시험을 받는 곳을 살펴보면 용맹의 전당이 어떤 공중 궁정과 같은 것이라도 궁정 내부로 들어가기 위한 야외 대로가 있기 마련이며 외부인이 궁정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헤임달의 시험은 외부 공간으로 구성하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보통 어느 건물이든 궁정이든 경비병들은 건물 바깥 입구에 서있기 마련이죠. 또한 용맹의 전당 자체가 궁정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레벨을 내부 공간으로 구성해버린다면 외부를 볼 일이 없기 때문에 '이 장소가 높은 하늘에 떠있다'라는 느낌을 주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던전의 시작 지점인 헤임달의 시험 장소는 외부로 구성하고 주변을 구름 바다로 가득 메우는 형태로 '이곳은 매우 높은 곳에 떠있다'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봉밀주 전당의 경우는 터프함으로 똘똘 뭉친 전사들이 결집하는 장소로,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먹고 떠들 수 있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이곳은 어떤 축제 혹은 연회장 같은 느낌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이 축제의 참석자들이 전장에서 거칠게 살아온 진정한 전사들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많은 술잔들과 고기 위주의 음식이 가득해야 하고 너무 정돈된 느낌보다는 다소 어지럽고 거친 느낌이 적절할 겁니다. 그런 환경에서 영화 호빗에서 난쟁이들이 왁자지껄 떠는 것처럼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는 전사들을 배치해놓으면 잘 어울릴 겁니다.

발키르의 전당은 봉밀주의 전당과는 다르게 시험을 치르는 장소이기 때문에 엄숙하고 다소 차분한 분위기여야 합니다. 또한 시험을 받는다라는 의미는 시험을 치르는 자 뿐만 아니라 시험을 대기하는 자, 시험에 통과한 자, 시험자를 심판하는 자들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심판하는 자, 여기서는 발키르의 수장인 에이르가 되는데, 이들이 위치할 장소는 다른 장소보다 더 위엄있으면서도 신적인 존재가 위치할 장소처럼 꾸며져야 합니다.

영원한 사냥의 들판은 사냥이라는 컨셉에 맞게 야생동물들이 뛰어놀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바로 이곳이 하늘 높은 곳에 떠있는 인공물이라는 점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블리자드는 이를 '마법의 문'을 통해서 지상 어딘가에 숨겨진 사냥터로 간다는 설정으로 풀어냈습니다. 이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 외에 2가지 방법을 더 제시해보자면 마치 콜로세움이나 로데오를 하는 장소처럼 시험장을 꾸미는 방법도 있을 수 있으며, 그게 아니라면 용맹의 전당 자체가 인공물만 떠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땅덩어리가 같이 하늘로 솟아올랐다는 것으로 풀어내어 궁정 옆에 작은 정원이 있는 것처럼 꾸밀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형태로 풀지는 레벨 기획자와 시나리오 기획자가 서로 잘 논의하여 정하면 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스코발드와 결전을 벌이고 오딘에게 최종 시험을 받을 장소는 이 장소의 수장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컨셉에 맞게 오딘의 단상은 앞선 발키르의 전당처럼 신적인 존재가 거주하는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해해야 하며, 유독 덩치가 빌딩만한 그의 덩치에 걸맞는 대규모 내부 공간을 구성해야 합니다. 또한 오딘이 있는 장소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혹은 평범한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는 느낌을 주면서 '아, 이제 위대한 존재를 만나러 가는 구나!'라는 장엄함 느낌을 주기 위해서 그냥 짧은 계단을 달려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전환 공간과 특별한 이동수단이 필요해야 할 수 있습니다. 블리자드는 이것을 마법의 다리를 이용하여 크고 매우 거리가 긴 빛으로 변해야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해결했습니다.

 

※ 용맹의 전당 레벨의 전경

대단히 높은 장소에 위치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주변 원경에는 지상에서 볼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배치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주변에 구름바다를 구성하여 공중의 느낌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다음으로 동선은 플레이어의 플레이 기준 서사에 맞게 앞서 정리한 각 구역들을 배치하면 됩니다. 서사의 순서에 따르면 가장 먼저 헤임달의 관문을 거치게 되며 이후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2가지 시험을 치르고 마지막에는 오딘에게 마지막 시험을 받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봉밀주의 전당 같은 경우는 특별히 그 장소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언급이 없고 플레이어의 플레이 패턴에 영향을 주는 서사라기 보다는 이 던전의 배경을 전달하기 위한 성격이 강합니다. 따라서 헤임달의 관문 이후 ~ 오딘의 거처 사이에만 등장한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곳이죠. 또한 사전 시험을 치르게 될 발키르 전당영원한 사냥의 들판의 경우는 어느 장소를 반드시 먼저 가야 한다는 제약이 없습니다. 즉 플레이어에게는 두 장소 중 어느 곳을 먼저 갈지에 대한 갈림길이 주어져야 하며 하나 더 잊어서 안 될 사실은 둘 중 어느 곳을 나중에 가더라도 그 다음은 반드시 오딘의 거처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헤임달의 관문, 발키르의 전당, 영원한 사냥, 오딘의 거처 4곳은 서로 빠르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이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4개 구역을 십자가로 연결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했을 때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바로 '동선의 안내'입니다. 지금과 같은 구성이 되면 헤임달의 관문을 통과하자마자 플레이어는 세 갈래 길을 만나게 될 것이고,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혼란해하게 됩니다. 이제 아까 어디든 배치되어도 무방하다고 했던 봉밀주 전당이 나타날 때가 되었습니다. 블리자드는 이 봉밀주 전당을 교차로가 되는 곳에 배치하여 교차로를 재미있는 장소로 만듦과 동시에 정면 방향의 오딘의 거처로 가는 길은 문을 닫아두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몬스터를 배치하여 '아직 이곳은 갈 수 없다'라는 느낌을 전달했습니다. 그럼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좌우의 뚫려 있는 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죠. 보통 이런 세밀한 동선 유도는 목업 레벨을 제작할 때 잡곤 합니다만, 동선을 설계할 때 어떤 식으로 유도할 것인지에 대해 대략적인 감각은 미리 가지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 용맹의 전당 지도 중 일부

지도 상에서 봤을 때 위쪽 끝이 시작 방향이며 하단의 갈림길 부분이 봉밀주 전당입니다.

그곳에서 왼쪽이 영원한 사냥의 들판, 오른쪽이 발키르 전당, 아래쪽이 오딘의 거처이죠.

 

  전체적인 동선 계획이 끝났으니 이제 플레이 패턴을 배치할 순서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플레이 패턴을 배치할 때 중요한 것은 2가지, 학습다양한 경험입니다. 이 글에서 각 보스의 패턴이나 던전 구성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글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모두 설명할 수는 없고 주요 포인트를 몇 가지만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학습에 관해서는 발키르 전당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시험을 치르려는 수험자와의 보스전이 전개되기 전에 플레이어는 그 수험자를 심판하는 2명의 시험관과 전투를 치르게 되고 각 시험관은 속성을 컨셉으로 하는 전투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윽고 두 시험관이 패배하여 발키르 수험자와 전투가 시작되면 수험자는 축복을 받아 발키르로 각성한 뒤 이전에 시험관이 사용하던 능력을 모두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통해서 본격적인 보스 전투를 치루기 전에 플레이어가 보스의 전투 방식을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다음으로 다양한 경험의 경우, 플레이어가 새로운 구역에 진입할 때마다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전투 패턴에 관해서는 각 보스의 패턴 학습에 적절한 일반 몬스터를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매 구간마다 새로운 패턴을 만난다는 재미를 줄 수 있지만(물론 이를 위해선 보스별로 패턴이 상이해줘야 합니다), 또 하나 신경써야 될 것은 각 구역들이 시각, 청각적으로든 이동방식으로든 새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맹의 전당을 예로 들면 헤임달을 만나기 이전까지는 야외 공간에서 용을 타고 다니는 기수들을 만나게 되지만, 봉밀주 전당에서는 내부 공간에 왁자지껄한 전사들의 잔치를 보여줍니다. 또한 영원한 사냥의 들판에 들어갔을 때는 다시 야외 공간에 인공물이 없는 자연 환경을 보여주며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전환해서 새로운 경험을 선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전 시험 2가지를 모두 완료한 뒤에 오딘의 거처로 이동할 때는 왔던 길을 다시 뛰어 되돌아가야 하는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서 평소에 느껴볼 수 없는 속도를 선사하는 이동속도 증가 버프를 부여하며, 봉밀주 전당에서 오딘의 거처로 이동할 때는 캐릭터를 빛으로 만들어 하늘다리를 건너게 하는 연출을 추가하여 매 순간 지루하지 않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 보스 펜리르가 위치한 영원한 사냥의 들판 구역

이전에는 인공물로만 이루어진 곳을 보다가 이 구역에 들어온 순간 완전히 달라진 환경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는 공간입니다. 이 던전은 인공물로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에 공간 구성에 대한 제약은 적은 편이므로 플레이 패턴 위주로 공간을 설정합니다. 기본적으로 5인으로 구성되는 파티가 진행하는 던전이므로 모든 전투 공간은 5인 기준으로 설정합니다. 또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카메라 각도는 프리 카메라이면서 카메라가 상당히 멀리까지 빠지기므로 생각하는 것보다 전투 공간과 벽의 거리는 훨씬 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카메라가 벽을 파고 들어서 긴박한 전투 중 위기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만약 그렇게 되는 것이 의도였다면 상관 없겠습니다만!). 각 구역의 보스가 위치하며 보스전이 이루어질 공간은 특수한 패턴을 가진 보스와 광범위한 전투를 펼쳐야 하므로 대단히 넓은 공간을 구성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헤임달이 서있는 곳, 발키르의 전당의 시험을 받는 곳, 펜리르와의 전투가 치뤄지는 장소, 오딘으로부터 직접 시험을 받는 장소는 다른 공간들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보스전 장소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공간이 다소 넓게 만들어졌다면 잉여 공간이 남는 것 정도의 비효율로 끝이 나지만 만약 공간이 작게 만들어졌다면 게임 플레이 자체가 불편해지거나 난이도가 너무 어려워져서 플레이어에게 매우 불쾌한 경험을 주게 됩니다. 따라서 생각보다 넓은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만약 보스가 어떤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유형의 전투를 진행한다면 그에 걸맞는 구조도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영원한 사냥의 들판의 펜리르의 경우는 던전에 방문할 때마다 다른 위치에서 등장합니다. 이를 위해서 펜리르가 위치할 장소를 여러 곳 설정해야 하는 것이죠.

공간을 고려하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역시 밀도이죠. 이동하면서 일반 몬스터와 전투가 이루어지는 공간들은 플레이어의 시선이 한 곳에 고정되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기 때문에 다소 밀도를 높여야 합니다. 특히 던전의 시작지점은 던전의 첫인상이니 임팩트가 있어야 합니다. 반면에 보스전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시선이 주로 보스에게 고정되고, 주변이 너무 밀도가 높아 화려하면 보스에 대한 가시성이 너무 떨어져서 플레이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오히려 밀도를 떨어뜨려야 합니다. 또한 플레이 타임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봉밀주 전당은 최소한 3번 이상 거쳐야 하는 장소가 되어 그 장소에서 머무는 시간이 다른 곳보다 더 길기 때문에 밀도를 높여야 하지만, 빛이 되어 오딘의 거처로 이동하는 마법의 다리는 공간이 매우 크고 넓어도 강제성을 가지고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하므로 밀도를 매우 낮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변에 구름 말고는 배치되어 있는 것이 별로 없죠.

 

※ 헤임달과의 보스전이 진행되는 장소

딱 보기에도 헤임달이 홀로 서 있기에는 지나치게 넓어보입니다.

하지만, 이 장소가 이렇게 넓고 긴 구조로 되어 있는 이유는 헤임달이 용을 불러 공간의 일부를 뒤덮는 공격을 가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닥과 기둥을 제외하면 그 어떤 작은 오브젝트나 깃발 조차 없이 밀도를 낮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공간이 넓어도 정면 중앙에 있는 헤임달이 눈에 잘 들어옵니다.

 

레벨의 밀도에 관해서는 특히 '획자가 그런 것까지 신경써야 하느냐, 아트의 영역이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레벨 기획자가 어느 곳에 어떤 구역을 설정하고 어떤 플레이 패턴을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구역별 플레이 시간이나 플레이어의 시선이 천차만별이고, 아티스트들은 보통 그 장소에 어떤 패턴이 있느냐까지는 파악하지 않고 전체적인 퀄러티를 생각하기 때문에 레벨 기획자가 반드시 가이드를 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선 자신이 만드는 레벨이 어떤 서사, 동선, 플레이 패턴, 공간을 가져야 할지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하겠죠!

 

만약 플레이패턴을 고려하지 않고 공간을 잡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빛으로 이동하는 구간은 이동 모습을 보여주긴 너무 짧거나 혹은 매우 빨리 지나감에도 지나치게 밀도 높은 작업을 해서 비효율을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동선을 고려하지 않고 플레이 패턴을 짰다면 어떨까요? 십자 교차로 부분에서 플레이어는 이동속도 증가 버프 없이 매번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수고를 해야 했을 것이며 던전을 재방문할 때마다 그 고통을 먼저 떠올려 던전에 대한 경험이 썩 좋진 않았을 겁니다. 환경을 생각하지 않고 짰다면 어떨까요? 설정과는 관계없이 주변에 산과 바위가 보였을 것이며 봉밀주 전당의 왁자지껄한 잔치는 개최되지 못했을 겁니다.

 

 

5. 마치며

  새로운 레벨을 만들기 시작하려 하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것은 신입, 경력 무관하게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이 발상 순서가 모든 상황에 반드시 옳다고 할 수도 없고, 고려해야 하는 레벨의 요소가 이것이 끝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맹목적으로 이 글의 순서에 얽메인다면 이 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것들을 놓쳐 버리거나 새로운 요소를 발상해내지 않고 안주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막 레벨을 시작하려는 분들에게 방향자가 되고 거기서 더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