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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창고_게임/레벨 디자인

레벨링 트랜드의 변화와 쉬운 게임

쉬운 게임의 대세

  최근 몇 년 간 여러 플랫폼과 장르의 게임을 경험하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갈수록 게임의 레벨링 트랜드가 쉽고 편리한 게임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게임 커뮤니티들에서 많이 보이는 불만과 맞닿아 있고 향후 게임 업계의 방향과도 꽤 연관이 깊어 보인다고 생각하여 한 번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고전적 레벨 디자인

  레벨 디자인(Level Design)은 유저의 경험 단계를 디자인하는 영역으로, 일반적으로는 난이도 디자인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게임은 유저가 게임에 가볍게 진입하게 한 다음, 점진적으로 난이도를 상승시키면서 더 어려운 과제를 요구하고 그것을 결국에는 돌파하도록 세심하게 제어하면서 성취감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어쩌면 수십 년 간 레벨 디자인의 정석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법칙이 깨진 듯 합니다.

 

 

모바일 붐과 게임의 대중화

  이 변화가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모바일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2010년대에 스마트폰 혁명이 시작됐을 때 당시만 해도, 모바일 게임 역시 아직 고전적 레벨 디자인 방식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점점 더 어려운 난이도를 요구하는 것이죠. 그러나 2010년 중반에 들어서 이 법칙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자동 플레이의 등장입니다. 처음에는 게이머 뿐만이 아니라 개발자조차도 격렬한 거부감을 나타냈습니다. 자동으로 진행되는 것은 게임이 아니라면서 말이죠. 하지만 2020년대에 들어선 지금, 자동 플레이는 모바일 게임의 기본 소양처럼 자리잡혔습니다.

 

어째서 이런 흐름을 타게 되었을까요? 게임이 모바일화 된 것이 게임이 자동화된 것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단순히 조작의 어려움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이것은 게임의 대중화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원래 게임은 PC와 콘솔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10~20대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당시의 많은 30~40대 분들에게는 PC를 다루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데, 게임을 한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였습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앱스토어가 탄생하자 갑자기 게이머의 풀이 급격히 커지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컴퓨터를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던 저희 어머니가 애니팡을 하고 계셨던 것을 보고 깨달았고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애니팡이나 쿠키런, 드래곤 플라이트 같은 단순하지만 쉬운 게임이 크게 흥행했고, 유저들 뿐만이 아니라 많은 개발자들이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동안 게임에 익숙했던 10~20대 게이머를 겨냥했던 게임들이, 이제 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10~40대까지 겨냥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중을 겨냥하면 게임은 필연적으로 쉬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프린터기도 쓸 줄 모르시던 어머니가 애니팡을 하시는 모습은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맞춤, 제한형 레벨링

  하지만 게임이 대중화되어 난이도가 쉬워졌다고 해도 뒤로 갈수록 어려워져야 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원래 게이머가 아니었던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견디면서 게임에 잔존해야 한다는 경험은 거부감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애초에 대중은 강한 열망을 느껴서 게임에 유입된 게 아니라 호기심에 동해서 유입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흐름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두 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로 레벨 스케일링입니다. 보통 레벨 스케일링은 유저의 성장도에 맞게 레벨을 자동적으로 상승시키는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호요버스의 원신을 시작으로 이 개념이 반대의 용도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유저 수준에 맞는 레벨을 제공하는 개념으로 말입니다. 이 게임들은 계정 레벨로 레벨 스케일링을 제어하되, 유저가 특정 도전 콘텐츠를 깨지 않으면 레벨이 상승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모든 콘텐츠를 즐길 수 있죠. 더 어려운 도전을 하고자 하면 올라가면 되고 그렇지 않다면 그대로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스템이 최근에 출시된 명조에도 들어간 것을 보면, 앞으로 나올 게임들의 트랜드로 자리잡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신의 월드 레벨이 이제 중국발 RPG의 기본 폼처럼 되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온라인 게임에서도 난이도 선택 기능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난이도 선택은 원래 PC, 콘솔 게임에서 많이 보이던 형태로, 게임 시작 전 혹은 진행 중에 게임이 어렵다면 자발적으로 난이도를 하향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모바일 게임에서도 이런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호요버스의 젠레스 존 제로가 콘텐츠에 도전 모드를 별도로 넣고 기본 난이도를 하향시키는가 하면, 일본의 헤븐 번즈 레드가 보스전 실패 시 난이도 하락 기능을 넣더니, 이게 어느 순간 붕괴 스타레일에 들어갔습니다.

 

게임사 입장에서는 난이도로 유저가 이탈하느니 쉽게라도 진행하게 하는 게 더 낫기도 합니다.

 

 

게이머 세대의 고령화

  게임들이 이런 형태를 보이게 된 이유가 뭘까요? 앞서 대중화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만, 한 가지 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게이머 세대의 고령화입니다.

 

갑자기 게임 이야기에서 고령화가 나오니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 게임 역시 콘텐츠이므로 콘텐츠 제작자로써 한 번쯤 생각해볼만한 문제입니다. 게임붐이 일어났던 당시에 한국은 200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와 같은 블리자드의 전성기였으며, 바람의 나라나 리니지 같은 온라인 게임의 전성기였습니다. 이들 게임 중 어느 하나도 편의성이나 쉬운 난이도를 고려한 게임은 없고, 오히려 사망하면 장비를 드롭하는 등 매우 어려운 게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게임을 주로 소비했던 세대는 당시의 10~20대, 많이 잡아야 3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2020년대입니다. 당시에 10~20대였던 사람들은 이제 30대~40대가 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제 직업, 가정, 생활, 나이가 생겼고 게임을 즐길 시간도 체력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한편 늘어난 게 생긴 것도 있으니 그것은 바로 경제력입니다. 이것이 게임 업계에 만든 흐름이 바로 지금의 게임 시장입니다.

 

주변의 30대 중후반 게이머 세대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가장 많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회 생활만으로도 힘든데 스트레스 받으면서까지 예전처럼 게임을 하고 싶지 않다."

"쉴 시간도 빠듯한데 뭔가를 배우고 공부하면서까지 게임을 하고 싶지 않다."

"게임을 하고는 싶은데 시간도 없고 체력도 부친다."

"돈을 써서라도 편하게 게임을 즐기고 싶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의 게임들, 특히 30~40대를 겨냥하고 나오는 대중적 게임들이 갈수록 쉬워지고 과금 위주로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이머도, 게임 개발자도 모두 고령화가 된 것입니다. 이런 타겟층이 메인인 시장이니 당연히 수동 컨트롤이나 조작감을 지향하는 10~20대의 게이머들의 눈에는 차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과금형 게임들이 상위권에 많은 이유는, 어쩌면 이런 흐름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일지도...

 

 

미래에는?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지금의 젊은 세대가 나이가 들면 세대 교체가 일어나면 달라지게 될까요? 제가 20대 후반, 30대 초반이었던 시절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현재의 제 견해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위와 같이 이야기하는 분들도 옛날 게이밍 경험 이야기를 꺼내면 다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공대장 좀 해보셨거나, PVP로 날아다니셨던 분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결국 게이머 세대의 나이인 것입니다.


지금의 10~20대 유저들이 30~40대가 되는 10년, 20년 뒤에는 그럼 어떤 모습일까요? 제 생각에는 레벨링 트랜드가 변화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30, 40대  유저들을 겨냥한 게임은 최대한 쉽고 가볍고 과금으로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마 현재 10, 20대가 즐기고 있는 게임이 쉬운 난이도와 자동 플레이를 가진 채로 과금으로 편히 즐길 수 있는 형태가 되어 유행하고 있지는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