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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창고_게임/게임 철학

[정의] RPG의 정의에 대한 고찰 - 3편 : 세계

RPG의 정의 대한 고찰 - 3편 : 세계

by Dreamrugi


※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군단의 수라마르


"캐릭터들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숨을 쉬고, 생각을 하며, 웃고 우는 등 살아있는 것이다." - 이남국 교수님


이번 고찰에서는 2편에 이어 RPG의 기본 요소 중에서도 '세계'라는 요소에 대해 고찰해보려 합니다.


1. 세계
  RPG, 곧 역할극에서 플레이어는 '가상의 세계'에서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세계란 '연극 무대'와도 같다는 것이죠. 흔히 CG 기법을 많이 사용한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의 인터뷰를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하곤 합니다.


"온통 녹색인 곳에서 아무것도 없이 연기를 하려니 몰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연기 경력이 많고 전문 직업으로 연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무대가 갖춰지지 않으면 제대로 몰입해서 연기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RPG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전문 연기자가 아니며 취미로 연기를 하는 사람 혹은 그 이하 수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갖춰지지 않은 무대'에서 '역할극'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몰입할 수(즐길 수) 없다" 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 일 것입니다.

아무리 매력있고 멋지고 비중있는 배역을 맡더라도 무대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몰입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잘 설계되고 시나리오적으로 매력적인 역할이 있더라도 그를 뒷받침 해줄 멋진 세계가 없다면 역할에 몰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상세계 속 역할에 제대로 몰입하려면 마치 자신이 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느껴야 하며 그렇기 위해서는 그곳이 마치 '실제로 다른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세계'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외산 게임은 세계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구성하고 있을까요?



※ 그린 스크린 VS 잘 꾸며진 연극 무대

   플레이어가 연기자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연극 무대가 더 몰입하기 쉽고 재미있을 것이라는 건 당연할 겁니다.



가. 위쳐3
 위쳐3의 세계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잘 보여주기로 유명한데 이점은 환경 컨텐츠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모든 '환경적' 요소들이 플레이어를 위쳐로써 게임에 더 잘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플레이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든 아니든 말이죠.


 앞서 2편에서 봤던 위쳐3의 인트로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세계에서 위쳐라는 존재는 썩 달갑지 않은 존재로 그려지는데, 이런 설정은 게임 세계 전반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마을 사람들이 위쳐를 대할 때 언짢거나 탐탁치 않은 듯이 대하는가 하면 지나갈 때 침을 뱉는다거나 괜히 시비를 거는 등 다양한 액션을 보여줍니다. 마치 실제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게 되죠.  살아있는 듯한 세계의 모습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 이단 처단을 부르짖으며 사람들을 광신도로 설교하고 있는 이터널 파이어 교단
- 갈곳을 잃어 이터널 파이어 종교에 목을 메는 빈민들
- 전쟁통에 인근 도시로 피난을 갔지만 피난민을 막기위해 설치된 검문소
- 검문소 앞에서 먹을 것을 구걸하거나 한탄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학대하는 병사들
- 길거리에서 싸움이 나면 겁에 질려 도망가는 주민들


또한 이런 디테일은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여러 몬스터들에게도 적용됩니다.


- 버려진 성채에 기생하게 서식하게 된 엔트레가
- 피난을 가다가 습격당해 강 아래로 떨어진 마차와 그 시체를 뒤지고 있는 익사체들
- 국가 간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과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는 시체, 그리고 그 시체를 뜯어 먹고 있는 네크로파지
- 무덤 속의 시신을 들추자 자신의 시신을 들추는게 불쾌했던 악령들


※ 위쳐3 스크린샷

   위쳐3 세계에서 위쳐는 사람들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라서 그들을 보면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현하는 NPC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이 플레이어의 위쳐 역할 몰입에 도움을 주게 됩니다.


※ 위쳐3의 구울들

   구울들이 꼭 시체가 많은 전쟁터 위주로 보이는 것은, 기능적으로 구울들이 전쟁터에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울들이 시체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비슷해보이지만, 이 두가지 접근 방식은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세세한 디테일들이 게임 속 NPC 하나하나가 그저 폴리곤 덩어리가 아닌 정말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주며, 이것은 다시 플레이어가 게임 속 세계에 보다 깊이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며 플레이어 스스로가 자신이 정말 위쳐가 되었으며, 마치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해줍니다. 예를 들자면 연극을 할 때 초보 연기자들끼리 연극을 하는 것보다는 숙련된 연기자들과 하는 것이 초보자들이 연극에 더 빨리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효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단순히 재미있으니까라는 개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세계'라면 당연히 그래야 되기 때문'

'플레이어가 스스로를 위쳐라고 느끼기 위해서는 위쳐 세계가 살아 움직여야 하기 때문'


이렇게 생각해야 되는 것은 아닐까요?



나. 엘더스크롤 4 : 오블리비언
 엘더스크롤 시리즈는 예전부터 살아 움직이는 세계라는 호평이 자자한 게임으로, 이 시리즈의 특징이라 하면 역시 '살아있는 NPC'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더스크롤의 모든 NPC들은 각자의 '생활'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NPC는 아침이 되면 집에서 나와 자신의 가게로 나가 장사를 시작하거나 마을을 산책하다 마주친 다른 사람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하며 벤치에 앉아 디저트를 먹는 이도 있습니다. 경비병들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치안을 유지하며 범죄자가 나타나면 가차없이 칼을 휘둘러 응징하기도 합니다.


※ 엘더스크롤 5 : 오블리비언의 여관 풍경

   여관 주인은 플레이어가 들어오면 반갑게 맞이합니다. 또한 여관을 방문한 모험가들이나 경비병들은 식사를 하거나 쉬었다가 나가기도 하죠.


NPC들은 밤이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취침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온 건물의 불이 꺼지고 도시 역시 잠에 빠지죠. 이때 플레이어는 집문을 몰래 열고 들어가서 물건을 훔칠 수 있는데 시끄러운 소리를 내서 NPC가 일어난다면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경비병을 불러들입니다.


※ 엘더스크롤 5 : 오블리비언의 도둑 퀘스트 중 한 장면

   엘더스크롤 5의 도둑질이 정말 재미있는 것은, 단순히 도둑하는 시스템이 재미있어서 일까요, 아니면 진짜 도둑질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만드는 세계 때문일까요? 사실 엘더스크롤 5의 도둑질 시스템이라는 것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락픽, 그리고 은닉이 전부라는 사실!


 이런 모든 것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개발, 투입되었을까요? 대부분의 기능을 위주로 생각하는 개발자들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개발력 여유가 남을 때나 하는 디테일'정도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엘더스크롤의 개발자가 그렇게만 생각했다면 벤치에서 쉬거나 일상 대화를 나누는 NPC들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항상 시간과 자금의 싸움이 벌어지는 게임 개발에 있어 '여유가 남을 때나 하는 디테일'이라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런 정도의 우선순위라면 결국 다른 컨텐츠, 시스템 개발에 밀리고 밀려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버리기 마련이죠. 그렇다면 엘더스크롤 개발자는 적어도 아래처럼 생각하고 이런 디테일들을 만들진 않았을까요?


'플레이어가 엘더스크롤에 좀 더 몰입해서 플레이하려면, 시로딜 세계가 살아 움직여야 한다'


이 정답은 다시 한 번, 아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가상 세계 속 역할에 제대로 몰입하려면, 마치 자신이 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그렇다면 외산 온라인 게임, 특히 자타공인 가장 성공한 MMORPG라고 칭송받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에서는 어떨까요? 외국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살아있는 세계가 온라인 게임에서도 충실히 지켜지고 있을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질문의 정답은 ''입니다. 와우 역시 세계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다양한 노력을 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야생 동물'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인 MMORPG에서 동물들은 단순히 퀘스트를 위한 거쳐가는 일개 몬스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게임 속 세계를 하나의 살아있는 세계로 본다면, 곰 하나, 사슴 하나가 모두 각자만의 삶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보다 생생한 게임 속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야생동물 역시 다른 NPC들처럼 마치 실제로 살아있는 것처럼 구현되어야 합니다. 

와우는 이런 점을 충분히 고려하여 야생동물을 보다 실제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야생동물들은 작은 가족을 이루어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기도 하며, 다른 가족을 만나면 수컷끼리 영역 다툼을 하기도 합니다. 사바나의 사자들은 햇빛을 피하기 위해서 덤불 속이나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잠을 청하고 있으며, 사슴 따위를 사냥하기도 합니다. 용들은은 사냥감을 찾기 위해서 절벽 끝에 앞발을 세우고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죠.


※ 와우 : 리치왕의 분노의 울부짖는 협만에 등장하는 뾰족 엄니들

   뾰족 엄니들은 주로 수컷과 여러 암컷, 새끼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합니다. 수컷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날에는 영역 다툼이 벌어져 수컷끼리 싸움을 벌어기도 하죠.


 기능 위주의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텐데 그런 것을 왜 만드느냐'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잘 생각해보면 이 말에는 크나큰 오류가 있습니다. 아래 몇 가지 질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  매일 출퇴근 길 주변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꽃잎 하나 '신경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  시골 길에서 고양이 한 두마리 지나다닌다고 '신경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  사람이 바글바글 거리는 강남에서, 옆 사람이 뭐하는지 '신경쓰는 사람'이 있을까요?


 물론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만 보면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필요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런 것들이 없어도 되는 디테일일까요? 이번엔 반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 매일 출퇴근 길 주변의 나뭇가지나 꽃잎이 절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 시골 길에, 고양이 한 마리, 개 한 마리 다니지 않는다면?
- 강남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기계 같이 걸어다니기만 하거나 로봇처럼 가만히 서있다면?


 이번에는 어딘가 느껴지는 위화감, 고요함, 어색함에 움츠러들 것입니다. 이러한 주변 환경들, 즉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개나 고양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해서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것들'입니다. 다시말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사람은 살아가면서 세상 모든 것들에 '의식'하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심리학에서는 모든 감각들이 익숙한 것들은 신경쓰지 않도록 스위치를 내려버린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않은 것들이 어느 순간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그 순간을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 와우 : 군단의 스톰하임에 있는 룬 숲

   가장 최근 확장팩인 군단의 지역 중 하나인 룬 숲. 룬 숲지기 나무 NPC의 뿌리 부분을 잘 살펴보면, 룬 숲에서 서식하는 사슴들이 나무 뿌리 근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라. 검은 사막
 그럼 국산 게임에는 이런 살아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게임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검은 사막'을 들 수 있습니다. 검은 사막은 보기 드물게 살아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게임입니다.


※ 검은 사막의 올비아 마을 풍경(1).

   장사꾼으로 보이는 NPC가 고블린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고블린이 가져온 물건을 흥정하려는 듯 합니다.


※ 검은 사막의 , 올비아 마을 풍경(2).

    자이언트족 대장을 필두로 주변의 병사들이 뭔가 대장에게 훈계를 듣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위와 같은 노력들 덕분에 검은 사막의 마을들은 굳이 플레이어가 북적거리지 않더라도 항상 활기가 돕니다. NPC들은 그냥 숫자가 많이 배치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일상에 맞게 다양한 행동을 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음성까지 가진 것도 있습니다. 위의 스크린샷에서 볼 수 있는 모습 외에도 게임을 하다보면 다양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NPC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 마을 광장에 모여서 일상 생활을 하는 사람들
- 훈련소에서 훈련하는 병사들
- 서로 자신이 뛰어나다며 자랑하는 모험가들
- 분수대 앞에서 노래하는 악단과 광대, 그리고 그것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 벤치에 앉아 사랑을 이야기하는 연인들


그뿐만 아니라 몬스터 역시 저마다의 마을에서 각자의 생활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게임 초반부에 만날 수 있는 코볼트들이 바로 아주 좋은 예시이죠.


※ 검은사막 올비아 마을 인근의 코볼트들

   지팡이를 든 제사장이 축복을 내려주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자, 전사계층으로 보이는 코볼트들이 절을 하고 있다.


  비록 MMO 특성상, 엘더스크롤이나 위쳐와 같은 패키지 게임 수준의 자연스러운 환경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국내외 MMO를 통틀어도 쉽사리 견줄 수 없는 수준의 환경을 구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NPC들이 북적거리는 살아있는 마을만큼은 와우도 한 수 접고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2.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개발하게 했는가?
 사실 엘더스크롤의 도둑질처럼 플레이어의 역할극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 외에는 위쳐, 와우, 검은 사막 모두 게임 플레이와는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실제로도 많은 기능적 성향이 강한 개발자들이 이러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합니다. (슬프게도 컨텐츠 기획자 중에도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필요없는 것일까요?


 많은 해외 게임들이 단순히 '예술성' 때문에 이런 환경을 구현하려 했을까라고 생각해본다면,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촉박한 개발 일정 속에서도 자연스러운 세계를 구현하도록 만들었을까요?

해외는 한국에 비해 훨씬 길고 오래된 게임 개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외에서 제작한 게임 다큐멘터리, '비디오 게임 더 무비(Video game the Movie)'에서 나왔듯이, 이미 해외는 아타리 쇼크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서 시스템이나 IP, 상업성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게임에도 감정을 이입할 대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바 있습니다. 그런 성장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해외 개발자들은 RPG 게임을 만들 때 매력있는 캐릭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며 거기서 더 나아가 캐릭터를 돋보이게 해줄 멋진 세계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 아타리 쇼크의 주원인이다고 평가되는 E.T.

   아타리 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서 게임을 출시하기 위해 수준 이하의 퀄리티를 가진 E.T를 그대로 출시했습니다. 그 결과는 미국 제일의 아타리 사를 추락시켰습니다.


※ 닌텐도가 1985년 발매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

    아타리 쇼크 2년 후, 닌텐도에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를 발매합니다. 더 이상 게임 시장은 미래가 없다고 판단되던 북미 시장에서, 이 게임 하나가 게임 시장의 제 2의 부흥기를 일으켰습니다. 마리오라는 캐릭터의 힘이었죠.

    


3. 국내 게임계는 어떤가?


"기능(시스템)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예술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국내 게임계의 현 시점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국내 게임계의 과거와 성장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국내 게임계는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급속으로 성장했고 그로 인해 많은 성장통을 건너뛰어버렸다고 생각됩니다. 무엇이 국내 게임계를 그렇게 빠르게 발전하게 했을까요?

 그건 바로 이른바 사업가들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2000년대에 이르러 그야말로 온라인 게임 붐이 일어나자 발빠른 사업가들이 게임에 많은 투자를 하기 시작했고, 우후죽순으로 게임 회사가 설립, 수없이 많은 게임들이 출시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여기서부터 고질병이 생긴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업가 혹은 투자자, 그들은 게임을 '예술'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게임이라는 컨텐츠는 영화나 문학 같은 문화 컨텐츠라기 보다는 단순한 기능 소프트웨어로 보였을 것입니다. 게임 컨텐츠에 대한 경험이나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로 수익성만 봤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술성'이라는 것은 소프트웨어의 판매 패키지 표지처럼 부수적인 것으로 비춰졌을 것이며 그런 부분 보다는 빠르게 만들고 출시해서 수익을 벌어들이는 것에만 집중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서 차용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 그것은 다른 게임들에서 '기능성이 입증된 것 혹은 수치적으로 증명된 것'을 차용해서 빨리 만드는 것이죠. 이것 때문에 곧 국산 게임들이 이른바 '양산형 게임'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기능적, 수치적인 것을 중요시 풍토'는 10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소설가, 영화 감독, 만화가 및 심지어 상업성을 중요시하는 대중 예술가들조차도 '이름, 설정, 세계, 캐릭터'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 게임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게임 개발자 중 몬스터 이름이 무엇인지, 보스 이름이 무엇인지, 지역 이름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곳은 어떤 세계인지 등... '세계'를 중시하는 사람은 대단히 극소수입니다. 간혹 그런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수치적, 기능적 근거'를 요구하는 이들에 의해 묵살되곤 합니다. 예술의 효과나 감상은 가시적인 근거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죠. 이러한 소위 '기능적인 사람들'에게 게임이라는 것은 '예술'의 하나가 아닌, '시뮬레이션' 중의 하나로 인식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게이머들이 각종 커뮤니티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국산 게임은 예술성이 없이 없다. 그저 양산형 게임만 넘쳐난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경험상 국내 개발자의 대부분이 '기능적인 마인드'를 가졌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예술성보다 기능과 효율을 중요시 합니다. 그들에게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무엇을 보상으로 얻느냐, 얼마를 벌어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기능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현 한국 게임계에서 효과가 절대로 수치화될 수 없는 '살아 움직이는 세계'라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개발 기간, 개발비에 여유가 있을 때나 만드는 사치로 취급될 것입니다. 적어도 아래 2가지가 이뤄지지 않는 한은 말이죠.


- 미국의 아타리 쇼크 및 마리오 등장처럼, 더 이상 기능적인 것으로는 성공할 수 없고 예술, 캐릭터성이 중요하다는 사례가 등장.
- 기능성이 중요시 하는 개발자 세대가, 예술성을 중요시하는 개발자 세대로 세대 교체.


첫번째가 이루어지면, 개발 자금을 지원하는 사업가들도 선뜻 예술적인 게임에 투자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챠 및 밸런스 관련 상품이 높은 매출을 올리는 현 상황을 보면 이런 상황이 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절대적 이유. 바로 국내에 그런 선례들이 있기 때문이죠.

두번째가 이루어지면, 악조건 속에서도 많은 개발자들이 예술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하지만 젊은 세대의 개발자 중에서도 기능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의 비율이 더 많으며 갈수록 감성적 성향을 가진 이들의 업계 이탈이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이 역시 빠르게 이루어지진 않을 것 같습니다.


4. 3편을 끝마치며
  잠시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진 것 같지만, '왜 국산 게임은 살아있는 세계를 구성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의 원초적인 부분을 찾다보니, 게임계의 과거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3편, '세계' 고찰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 RPG에서 역할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살아있는 세계가 필요하다


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기능성과 수치를 더 중요시하는 국내 게임 개발 풍토에서는 쉽사리 추구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컨텐츠 기획자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도 예술성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