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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창고_게임/게임 철학

[정의] RPG의 정의에 대한 고찰 - 2편 : 역할

RPG의 정의 대한 고찰 - 2편 : 역할

by Dreamrugi


"사냥꾼 되어보지 않겠는가?"

- 프롬소프트웨어, 블러드 본 -


  지난 고찰에서 RPG의 정의와 기본 요소에 대해 고찰해보았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궁금증을 해결해볼 순서입니다. 무엇 때문에 국산 RPG는 외면받고 외산 RPG는 칭송받는 것일까요? 정의와 기본 요소에 입각하여 무엇이 차이이고 문제인지 고찰해보았습니다.


1. 역할
  1편에서 고찰해보았듯이, RPG(Role Playing Game)란, 허구적인 설정 안의 인물의 역할이 되어보는 게임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게임을 플레이 하는 유저들은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될 것인지 알고 게임을 시작할까요? 혹은 RPG의 목적이 무엇인지 은연 중에라도 인지하고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게임을 시작할 것이며, 심지어는 플레이 중에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 컨텐츠가 플레이어에게 이 허구적인 세계에서 무슨 역할을 맡게 될 것인지 설명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RPG 의 본질이 '역할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역할 수행을 위해 만들어진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자신의 역할을 모른다면 플레이의 목적을 잃고 헤메다가 이탈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이해했을 때 감정이입이 되고 RPG 속 캐릭터가 나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죠. 이는 마치 배우들이 인물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친구들과 작은 연극을 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몰라 어중간하게 서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연극에 흥미를 잃고 중간에 이탈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릴 것입니다. RPG 역시 마찬가지이죠. 정리하면,


- RPG는 플레이어가 주어진 역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다면, 외산 RPG 에서는 역할에 대해 충실히 설명하고 있을까요?


가. 위쳐 3
  이 게임에서는 인트로 영상에서 세계의 상황에 대해 안내하고, 앞으로 플레이어가 맡게 될 위쳐가 어떤 이들인지에 대해 안내합니다.


※ CD 프로젝트 레드의 위쳐3 : 와일드 헌트의 인트로 시네마틱 영상

    이 영상을 통해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맡게 될 역할인 '위쳐'에 대해 이해하고,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게임을 시작하면 이어지는 트레일러 영상, 플레이어가 맡게 될 역할인 '위쳐 게롤트'가 흔적을 쫓아 누군가를 찾아다니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앞으로 플레이어가 위쳐 게롤트로써 무엇을 하게 될 것인지 안내합니다.


※ CD 프로젝트 레드의 위쳐3 : 와일드 헌트의 오프닝 시네마틱 영상

   이번에는 누군가를 추적하는 장면을 통해, 플레이어는 자신이 맡게 될 게롤트라는 '역할'의 핵심 과제가 무엇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게임을 시작하면 튜토리얼 플레이에서 게롤트가 앞으로 찾아야 하는 이들을 보여주고, 그들을 왜 찾아야 하는지 알려주며, 플레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튜토리얼 플레이에서 만났던 이들을 찾아 헤메는 퀘스트가 계속 등장합니다. 정리하면 위쳐3 게임플레이 초반에는 아래와 같은 방법으로 위쳐와 게롤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 트레일러 영상에서 위쳐의 탄생과 정체성에 대해 안내

- 오프닝 영상에서 위쳐 게롤트의 현재 상황에 대해 안내

- 튜토리얼 및 초반 플레이를 위쳐 및 게롤트 역할에 대한 플레이로 구성


즉 이 모든 과정이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주어진 역할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는 것이죠.



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이 게임에서는 캐릭터 생성 후 첫 접속 시 캐릭터가 속한 종족의 배경 설명을 컷신으로 안내합니다. 기원은 어떻게 되는지, 지난 업데이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플레이어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 등을 짤막한 나레이션으로 설명하죠. 또한 초반 튜토리얼 지역 퀘스트의 경우, NPC들이 종족의 숙명과 과거 이야기, 종족/연합의 일원으로써 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언급하고 그와 관련된 일거리들을 퀘스트 과제로 제시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플레이어가 자신의 역할에 더 몰입할 수 있게 돕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데드 종족을 예로 들자면 먼저 아래와 같은 인트로 영상을 통해 현재 종족의 현실에 대해 안내해주면서 영상 말미에 '포세이큰의 일원으로써' 라는 말로 플레이어가 포세이큰의 일원이라는 역할을 해야 함을 안내합니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대격변의 언데드 인트로 영상

블리자드 같은 회사에서 볼거리도 없는 인트로 영상을 굳이 넣으면서 이 나레이션을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만큼 RPG에서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죠.


  인트로 종료 후 지급되는 첫번째 퀘스트에서 NPC 아가타는 플레이어에게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날 것인지, 어둠의 여왕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언급하는데, 이때 어둠의 여왕을 섬긴다는 것은 인트로 영상에서 언급했던 포세이큰의 일원으로써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고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는 것은 앞서 1편에서 언급했듯이 주어진 역할 외에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선택지입니다. 이후 진행되는 티리스팔 숲 퀘스트에서 플레이어는 포세이큰의 일원으로써 종족에 위협이 되는 적을 처치하거나 그들을 일망타진 하기 위한 연금술 재료를 모으는 등, 포세이큰의 생존을 위한 다양한 퀘스트를 수행하게 됩니다.


"초반 플레이 내내 플레이어에게 자신이 무슨 역할을 맡게 되었는지 안내해주고,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퀘스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죠."



다. 외산 게임 예시의 결론

  MMORPG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오프라인 패키지 RPG 위쳐3를 보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상관없이 RPG에서 중요한 것은 '역할'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플레이어가 자신이 맡게 될 역할을 최대한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프롬 소프트웨어의 블러드 본 인트로 영상
역할의 중요성을 아는 것은 북미 뿐만이 아닙니다. 일본 역시 인트로 영상을 통해 '나'라는 존재의 역할을 부여해줍니다.



2. 리니지2 레볼루션 개발 당시는 어땠나?
  리니지2 레볼루션 개발 중기 테스트 당시 피드백 중 RPG에 익숙하지 않은 플레이어들의 UX피드백에서 가장 눈에 많이 띄었으며,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피드백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래의 피드백이었습니다.


   "게임을 시작했으나,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당시 팀 내부적으로는 '초반 진행 가이드가 부족하다'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퀘스트를 강제로 진행하게 만들고, 퀘스트를 따라가기만 하면 컨텐츠를 자연스럽게 배워나가게 하는 방식을 택했고, 모두가 그에 만족하는 듯했습니다. 실제로 RPG에 익숙한 플레이어들에게는 잘 동작했습니다.

  

  

   

여긴 어디, 난 누구?


퀘스트를 왜 하는지,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은,

내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바쁜 개발 와중에 잊혀져 버린 중요한 피드백이 하나 있었습니다.


"내가 퀘스트를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뭘 위해 하는 것인가?"


당시에 저는 엘더스크롤 시리즈를 떠올리면서 플레이어가 자신이 이 게임에서 어떤 역할과 사명을 짊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모험을 하게 될 것인지 역할과 목적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아덴 월드를 자유롭게 탐험할지, 이름난 혈맹의 일원이 될지 선택하라" 라는 식의 플레이 경험을 넣자고 의견을 제시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팀원들은 '기능적인 측면'으로 접근했고, 그 결과 도출된 결론은 '컨텐츠를 더 빨리 열어주고, 할 수 있는 것이 많아 지도록 만들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뭘 해야 될지 모른다'는 것을 '할 것이 없다 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리니지2 레볼루션에서는 '당신은 아덴을 이끌어나라갈 혈맹의 일원이 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굳이 찾아내자면 혈맹 튜토리얼에서 '자네가 미래의 어떤 혈맹의~'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전부라고 할까요? 비록 리니지2 레볼루션이 현재 상업적인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곤 하지만 저는 이 성공이 "주 유저층이 원작 리니지  PC 게임 경험을 토대로 IP가 제시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했던 것" 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과연 리니지 이름이 붙지 않은 채 길드, 공성 컨텐츠를 선보였어도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역할을 이해하지 못한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이 게임에서 무슨 역할을 맡게 되었는지 모른 채,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 모른 채,

   어떤 배경의 역할극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인물을 이해하지 않고 대본만 읽는 배우처럼 그저 자동기능이 해주는대로, 올라가는 수치만 보고 재미를 느끼다가 떠나갑니다. 만약 역할이 없이 수치적 성장만 있다고 한다면 RPG(Role Playing Game) 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RPG라기 보다는 이쁜 비주얼을 제공하는 성장 시뮬레이션에 가깝진 않을까요?  만약 다시 만들 기회가 주어진다면 리니지 2 레볼루션의 초반 컨텐츠를 이렇게 구성할 것 같습니다.

  
● 현재의 인트로 영상을 어둠의 결사의 야망을 저지한 혈맹과 혈맹원들로 풀어냅니다.


● 초반 플레이가 종료된 후(말하는 섬 마을 입장), 팝업/다이얼로그 등의 형태로 유저에게 게임의 핵심 역할과 자유로운 모험 중 선택권이 있다는 안내를 합니다. 시나리오 퀘스트를 진행하여 아덴을 위기에서 구하는 혈맹원의 일원이 되거나, 직접 혈맹을 만들어 아덴을 다스려보세요!"


● 말하는 섬의 시나리오 퀘스트에서는 소속 없는 용병으로써 시작한 플레이어가 크고 작은 혈맹들을 만나 혈맹의 중요성, 개념을 이해하도록 구성하고, 거기에 뒤이어 혈맹 간의 갈등, 영토를 놓고 벌이는 분쟁에 대해 초점에 맞춰서 구성합니다.


● 글루디오 영지부터는 플레이어가 '아덴을 선도할 혈맹의 일원'이라는 역할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이때부터 어둠의 결사와의 대립 구도를 만듭니다. 단, 지금의 은빛 용병단 VS 어둠의 결사 대립 구도보다는, 혈맹 연합 VS 어둠의 결사 대립 구도로 우호 진영을 변경하고, 우호 진영에서도 혈맹 연맹 안의 정치적 대립 등을 그려 끊임없이 '혈맹의 일원'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유도합니다.


● 현재 퀘스트와 연결되어 개방되는 모든 컨텐츠는 '아덴의 주민이 플레이어의 혈맹에 의뢰하는 형태'로 시나리오를 구성합니다.


이렇게 구성한다면, 아래와 같은 기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RPG를 처음 접하는 플레이어                        -->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 몰라 이탈하는 일이 줄어들 것입니다.
● RPG는 알지만 리니지를 처음 접하는 플레이어  --> 게임의 핵심 역할과 궁극적으로 노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 모든 플레이어                                           --> 아덴 세계 속에서, '나'라는 정체성을 빨리 확립하여 몰입도가 높아질 것입니다.



3. 2편 역할을 마무리하며,
  플레이어들에게 '현재 플레이 하시는 RPG 게임에서, 자신이 어떤 일(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음을 던진다면 그들은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요? 아마 이런 대답이 아닐까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플레이어 : "전 호드(얼라이언스)의 일원으로써 타진영을 쳐부숩니다!"

블레이드 앤 소울 플레이어 : "홍문파 막내로써 복수를 위해 떠나고 있죠."

위쳐3 플레이어 : "위쳐로써 괴물들을 잡고 다니죠."

스카이림 플레이어 : "도바킨으로써 용잡으러 다닙니다."

 
그렇다면 리니지2 레볼루션의 플레이어들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개발자들이 원하는 대답은 아마 이런 대답일 겁니다.


"혈맹의 일원으로써, 아덴을 휘어잡을 사람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리니지2 레볼루션이 리니지 IP 처음 접하는 플레이어가 과연 이런 대답을 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을까요?  비단 리니지2 레볼루션 뿐만이 아니라 많은 게임들이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