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이야기
개발을 하다 보면 아직 충분히 숙련되지 않은 분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문제가 설정을 미친 듯이 파고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성공하는 많은 작품들이 잘 짜여진 설정을 기반으로 되어 있을 텐데, 저는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왜냐하면 사실 설정을 잘 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활용하여 표현하는 것인데, 대부분의 사람이 표현의 기술보다는 설정을 깊게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재료로서의 설정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콘텐츠 제작에 설정이 필요 없다는 이분법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연히 설정이 잘 준비되어 있으면 더욱 재미있는 콘텐츠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콘텐츠 제작을 요리로 비유한다면 설정은 어떤 영역에 해당될까요? 저는 요리 재료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재료의 질이 좋으면 당연히 맛있는 요리가 될 확률이 올라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값비싼 재료를 쓴다고 하더라도 요리사의 실력이 형편없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반대로 요리 실력이 좋으면 다소 재료의 질이 떨어지더라도 어느 정도의 맛은 보장되기 마련입니다.
설정이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유사 사례는, 시선을 게임이 아닌 외부로 조금만 돌려보면 의외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귈 때 그 사람의 과거를 모르고 보통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대부분의 명작 영화는 약 2시간이라는 런닝타임 내에 제한된 분량의 설정만 어필합니다. 수많은 명작은 복잡하지 않은 세계관을 기반으로 전개되고는 합니다.
게임 콘텐츠 제작도 마찬가지입니다. 설정은 매력적인 콘텐츠(캐릭터 등)를 만들기 위한 재료입니다. 즉, 재료만 가지고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어필할 수 없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재료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든 상관없이, 그것을 가지고 최선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표현 능력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기획자들이 설정을 깊게 파는 것에만 역량을 집중하고는 합니다.
설정 개발의 함정
그렇다면 왜 자꾸 우리는 설정을 끝없이 파고드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 그 이유는 바로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설정이 유저에게 재미있게 어필되는 것이 아니라, 작업하는 우리 자신이 설정을 파고 드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방대하고 잘 짜여진 설정은 그럴듯해 보이며, 설정이 잘 준비되어 있으면 완성되어 보입니다. 방대한 양으로 쌓인 설정을 바라보는 작업자는 거기에서 일종의 성취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게임의 개발, 재미에는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요?
냉정한 현실을 이야기하자면 콘텐츠 제작은 시간 싸움입니다. 그것이 게임이든 소설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시간이 오래 소요될수록 개발비는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나며, 트랜드는 쉴 새 없이 빠르게 바뀝니다. 그리고 특히 게임 개발에서 설정은 개발의 가장 첫 시작점이기 때문에, 설정 지연은 아트 리소스 제작, 전투, 개발 등의 연쇄적 지연을 야기합니다.
그런데 설정 작업을 한번 파들어가기 시작하면 말그대로 끝없이 매몰됩니다. 역사, 대륙, 지형 구조, 식생, 세력 관계, 문화, 건축 양식, 정치 구조... 나열하자면 아직도 끝이 없지만 이중에서 실제로 콘텐츠 제작에 쓰이는 것은 얼마나 될까요? 더욱이 콘텐츠의 매력 어필에 실제로 활용되는 것은 그중 몇 퍼센트일까요?
제게 조언을 해주신 모 1세대 개발자 분의 말씀에 의하면, 한국 게임 초창기에는 종족별 언어까지도 매우 깊게 설정하는 관행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유의미한 효과 없이 시간만 많이 허비하고 개발 기간만 늘어나서 현재는 그런 관행이 많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또한, 잘 생각해보면 유명한 작품은 대부분 처음부터 설정이 다 갖춰져 있었다기 보다는 점차 빌드업 되면서 설정이 완성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빌드업이 완성된 결과물만 기억하기 때문에, 마치 새로 작품을 시작할 때 모든 게 끝난 상태로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갈수록 방대하고 디테일해지는 설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 결국 콘텐츠 제작자의 발목을 붙잡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설정 충돌이 바로 그것입니다. 설정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콘텐츠 제작자가 그 모든 설정을 숙지한 상태에서 작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추가된 설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정리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어지며, 이것은 여러 기획자가 동시에 작업할 때 더욱 심화됩니다.
방법론
그렇다면 어떻게 작업해야 할까요? 이 글에서는 3가지 정도의 방법론을 제시해볼까 합니다.
필요한 것부터 설정
당장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것부터 설정을 시작합니다. 보통은 1차적으로 유저에게 어필되는 요소(캐릭터의 외모, 성격, 표면적 관계, 지역의 생김새, 기본적인 식생,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사건의 표면적 관계)입니다. 이후 콘텐츠 제작 진행에 따라 새로 필요해지는 것을 조금씩 살을 덧붙여나갑니다. 이를 테면 두 인물의 관계성 심화가 필요해질 때 과거사를 추가하는 식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마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는 질문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생각을 바꿔야 하는 부분이며 그동안 작업을 잘못된 방식(무엇을 표현할 지 생각하지 않고 작업했다는)으로 하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결국 중요한 것은 표현하는 것입니다. 유저에게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보고, 거기에 필요한 것을 설정해야 합니다. 뭐가 필요한지도 모르고 일단 설정을 파들어가서는 안됩니다.
글로벌한 성공을 거둔, 스토리로 유명한 모 게임 개발사의 설정, 스토리 개발자로 참여한 개발자 지인분의 말씀에 의하면, 그곳은 설명하지 않을 것은 설정할 필요도 없다는 기조가 있다고 합니다. |
먼산 기법
과거에 다른 글에서도 다룬 적이 있었던 방법론입니다. 설정을 필요한 것부터 만든다고 해도 나중에 갑자기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것들이 튀어나오면 뜬금없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일단 필요한 만큼만 설정하되 미완의 부분은 틈으로 만들어서 유저에게 제공하고 나중에 메워주는 것이 좋습니다. 무언가 더 내용이 있을 만한 것(흔히 말하는 복선)을 흩뿌려 놓고 하나씩 회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 멀리 운명의 산이 있다'라고 작품 초기에 언급합니다. 하지만 그곳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누가 살고 있으며, 어떤 식생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것은 그곳에 도달하여 실제로 그곳을 확인해야 할 때 설정해도 늦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때 뿌렸던 것을 얼마나 잘 기억하고 회수할 수 있느냐가 작가의 역량을 구분 짓는 것 같습니다. 먼산 기법을 너무 남발하고 회수 하지 않으면 부정 평가를 피할 수 없으며, 너무 적게 활용하면 기대감이 없어지고, 너무 잘 회수하면 틈이 없어집니다. 적절히 활용하고 적절히 회수하는 것. 거장의 스토리들은 그것이 잘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정했으면 써먹기
요리 재료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요리하는 실력입니다. 질 좋은 재료가 준비되어 있을 때 그것으로 요리하려면 무엇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까요? 바로 어떤 요리 재료가 준비되어 있는지 모두 숙지하는 것입니다. 보통 이야기나 대사를 쓰는 작업에 들어가면 많은 사람이 거기에 매몰되어 어떤 설정이 있었는지 잊고는 합니다. 하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은 본인이 만든 설정이든, 같은 팀원이 만든 설정이든, 콘텐츠에 해당하는 모든 설정을 충분히 숙지하고 그것을 가장 맛있는 순간에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설정을 해놨는데 그게 활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업계에 있으면서 수많은 사람은 작업물과 포트폴리오를 봤지만, 설정을 제대로 무기로 활용할 줄 아는 사례는 정말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단발적인 시스템 대사에서는 어떻게 써먹은 다고 해도, 여러 인물이 얽혀서 서로 상호작용하는 단/장편 스토리 작성으로 넘어가면 대부분이 스토리를 전개하는데에 급급하여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극복해냈느냐가 주니어 제작자와 시니어 제작자의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라고 판단합니다. |
거장도 다르지 않았다
명작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작품 중 하나가 반지의 제왕입니다. 제 블로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저 역시 톨킨의 열렬한 팬입니다. 하지만 톨킨의 레젠다리움에 관련해서는 널리 잘못 알려진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운데땅의 이야기가 모든 설정(역사, 종족, 인물의 배경 등)이 잘 준비된 상태로 전개됐을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진실은 오히려 레젠다리움은 과거부터 현재가 아닌, 현재부터 과거로 점차 쌓여진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가운데땅의 이야기는 톨킨이 잠자리에 드는 자녀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든 소인족에 관한 작은 동화에서 시작됐으며, 이것이 소설 호빗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반지의 제왕이 탄생했으며, 그 뒤로 먼 과거 이야기인 실마릴리온이 점차 쌓여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즉, 호빗이나 반지의 제왕이 탄생하던 시기에는 아직 가운데땅의 과거 대부분이 안개에 쌓여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과 실마릴리온을 통틀어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인 갈라드리엘은, 그녀의 태양 제2시대의 행적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톨킨이 돌아가셔서 3개의 버전으로 확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을 보는 그 누구도 그것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톨킨은 갈라드리엘이라는 재료가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맛있게 요리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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