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 창고/게임 내러티브

서사의 재미 그리고 게임

1.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다양한 매체에서 수많은 서사를 경험하고 그것에 대해 재미에 대한 거짓 없는 평가를 내립니다. 우리가 콘텐츠의 서사를 보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콘텐츠 제작자가 소비자에게 줄 수 있는 서사의 재미는 어떤 것일까요? 반 년 전쯤부터 이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어느 정도 실마리를 찾았다고 생각하여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서사를 보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서사의 재미 : 심리 그리고 감정

  우리가 서사를 보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은, 두뇌의 논리적 판단이 아닌 일차원적으로 느낀 것입니다. 실제로 느끼고 있지만 머리로는 잘 이해할 수도, 입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심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친구에게 슬픈 일이 생겨 슬퍼하다가 그가 그것을 극복하면 함께 기쁜 것처럼 우리가 그것을 서사 속 주인공에게 느낄 때와, 공부할 때 문제의 해답을 찾았을 때 기쁜 것처럼 서사에서 궁금했던 것의 해답을 얻었을 때, 우리는 이런 감정을 느낀 콘텐츠를 재미있다고 표현합니다. 즉, 서사에서 어떤 재미를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결국 소비자가 어떤 심리, 감정을 느끼게 할 것인지라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라스트 오브 어스의 서사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은, 티격태격하던 조엘과 엘리가 점차 가까워짐에 따라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그들이 편히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도 있으며, 거기에 어떤 논리적, 합리적 판단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로, 프린세스 커넥트, 시노 앨리스, 그랑블루 판타지와 같은 캐릭터 수집형 게임을 보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은, 캐릭터의 개성이라는 일차원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점이 크며, 역시 거기에는 어떤 논리적, 합리적 판단이 개입하지는 않습니다.

 

라스트 오브 어스의 재미는 조엘과 엘리로부터 느끼는 어떤 감정이 아닐까요?

 

대서사시보다는 캐릭터의 매력이라는 일차원적 재미에 집중된 CCG

 

 

3. 학문적 완성도와 이론의 함정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재미있다고 생각한 서사들을 살펴보면 의외로 학문적으로는 오점이 많거나 어떤 예술적인 철학이 없는 것이 의외로 많으며, 반대로 구성에 빈틈이 없으며 깊이 있는 철학이 담겨 있더라도 흥행에 참패하는 서사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사의 재미에 학문적 완성도나 철학과 같은 어떤 체계나 이론이 필수는 아님을 시사합니다.


이것은 서사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사실입니다. 과거, 어느 원화 강사는 그림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잘 그리려고 하기 이전에 매력적으로 그리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과거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빌보드 차트를 석권한 음악을 만든 미국 작곡가 중 많은 이들이 전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론이나 지식을 쌓으면 쌓을수록 그것의 완성도를 추구하다가 본질인 재미를 놓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서사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며, 저 역시 여러 분야를 경험하면서 완성도를 추구하다가 정작 매력과 재미를 잃었던 경험이 많습니다. 또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들이 대부분 호평을 받지만, 일부 작품들이 너무 난해하여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도 같은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비자는 비전문가이므로 소비하는 콘텐츠의 이론, 학문적 완성도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또한, 소비자는 콘텐츠의 그런 완성도보다는 순수한 재미를 원하므로, 비록 서사가 이론적, 학문적으로는 완벽하더라도 정작 분명한 재미를 주지 못했다면, 그들은 매몰차게 콘텐츠를 외면할 것입니다. 대중 콘텐츠 제작자로써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 교과서 같은 서사가 아니라, 재미를 줄 수 있는 서사이어야 하지 않을지 생각이 듭니다. 또한, 이것은 양자택일이 아닌 우선순위의 문제로, 궁극적으로는 재미를 먼저 확보하고 그다음에 학문적 완성도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테넷은 분명 잘 만든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많은 이들에게 재미를 주었을까요?

 

 

4. 서사의 재미와 장르

  사람은 각자 심리나 감정에 반응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므로, 거기서 기인하는 재미의 기준 역시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보통 이런 경우를 취향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이 중에서는 대다수의 공감을 가지는 재미나 취향도 있기 마련인데, 이런 대중적인 유형들을 별도로 분류한 것이 바로 장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서사의 장르는 서사에서 주려는 재미 혹은 심리, 감정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사 연애 감정과 코믹한 재미를 주고자 했다면 그것은 러브 코미디 장르가 되는 것이며, 공포 심리와 호기심, 깨달음으로 인한 충격을 준다면 그것은 공포 스릴러가 되는 것입니다.

 

서사에서 주려는 재미, 즉, 장르는 서사를 담는 매체의 음악, 시각 효과, 묘사법 등 콘텐츠 전반적인 구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러브 코미디 장르의 영화라면, 배우를 밝고 활기차며 인상 좋은 인물로 섭외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스크린의 시각적 분위기, 귀로 들려오는 음향까지 밝고 경쾌하게 제작될 것이며, 반면에 공포 스릴러 소설이라면, 책의 표지와 제목부터 소름 끼치고 어두운 외관을 가지며, 책 속의 삽화, 묘사, 서술까지도 모두 음침하면서도 호기심이나 공포 심리를 유도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인상 깊게 봤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 코믹하고 밝은 분위기

 

 

5. 서사의 재미와 게임 장르

  그렇다면, 게임 역시 재미와 장르 간의 관계가 다른 매체와는 같은 법칙을 가질까요, 아니면 다른 법칙을 가질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절반은 맞고 절반을 틀리다고 생각합니다.

 

절반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사를 담고 있는 게임이라면, 게임 역시 장르를 불문하고 앞서 말한 법칙을 따라갈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이오 하자드와 같은 공포 게임이 줄 수 있는 서사적 재미는 공포 스릴러 장르와 같은 것이므로, 시각적 분위기, 음향뿐만이 아니라 게임 플레이 역시, 1인칭 시점의 구성한 뒤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좁고 닫힌 환경을 조사하는 레벨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예로, RTS 장르의 스타크래프트는, 종족을 초월하는 거대한 전쟁을 다루는 서사와 함께, 시각적 분위기이나 음향 효과는 역시 전쟁이나 세기말의 분위기를 내면서, 게임 플레이는 전황을 보는 듯한 쿼터뷰를 채택하고 군대를 관리하고 움직이는 매니징 형태의 시스템을 구축하여 전쟁에 참여하는 지휘관 같은 경험을 주었습니다.

 

바이오 하자드 빌리지 : 전체적으로 공포 스릴러다운 게임 플레이, 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틀린 나머지 절반을 무엇일까요? 게임은 영화나 소설과는 달리 콘텐츠의 목적이 서사가 아닌 게임 플레이입니다. 즉, 소설이나 영화는 서사 전달이 목적이므로 이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여러 장치를 마련하는 반면에, 게임은 게임 플레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여러 장치 중 하나로 서사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게임의 서사는 게임이 게임 플레이로 어떤 감정, 심리에 기반한 재미를 주고자 하는지 이해하고 거기에 맞춰 제작되어야 합니다.

 

FPS 장르 게임이면 특수부대 혹은 전쟁 서사가 되어야 한다는 류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 게임이 콜 오브 듀티 월드 엣 워와 같이 2차 세계 대전 전장에 있는 것 같은 경험을 주고자 한다면, 이 게임은 전쟁 영화를 즐기는 남성이 주로 플레이할 것이며 1인칭 시점이 기반이라는 것을 이해한 뒤, 플레이어가 NPC에게 전우애와 같은 감정, 심리를 느낄 수 있는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쟁 설비가 어떻고 전술이 어떻다는 것은 이런 재미를 주기 위한 도구로서, 본질이 아닌 2차적인 문제입니다. 다른 예로 미소녀 캐릭터 수집형 게임이면서 게임 플레이가 캐릭터 조합 전략성에 치중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이 경우 학원물이나 러브 코미디를 좋아하는 플레이어를 고려하여, 유사 연애 감정이나 코믹한 재미를 주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 이 장르에 어울리는 서사의 재미(감정,심리)는?

 

 

6. 마치며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를 모두 종합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서사의 재미는 소비자가 서사에서 느낄 심리, 감정에 기인합니다.
- 학문, 이론적 완성도보다는 본질적 재미에 먼저 집중해야 합니다.
- 서사의 재미는 장르로 귀결되며 콘텐츠 구성 전반에 영향을 줍니다.
- 게임은 게임 장르 종류와 재미에 서사가 보조적으로 맞춰집니다.

 

서사가 재미있다 혹은 없다는 것은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라서 누구나 쉽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논리적, 합리적인 추론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일차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므로 타인에게 참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 글의 인사이트가 부디 각자가 생각하는 재미의 기준을 세우는 데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