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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창고/게임 내러티브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서사

1. 시작하기 전에

  그랑사가를 개발하고 서비스하면서, 리니지2 레볼루션을 서비스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게임 서사와 관련된 플레이어 피드백을 다수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서사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한편, 블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서사로 혹평을 받는 것을 보면서,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서사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서사는 패키지 게임과는 명백히 다르다는 것인데, 지금부터 그것에 대한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려 합니다.

 

라이브 서비스 게임 서사의 핵심을 깨닫게 해줬던 PC 준

 

2. 특징

  오랜 역사를 이어온 패키지 게임. 이 게임 서사의 특징은 후속작이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완결된 서사로 게임이 출시되므로 이후에는 서사의 변동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책이나 영화와 같은 전통 서사 매체들과 결을 함께 합니다.

  그러나, 온라인 게임 태동 후 등장한 라이브 서비스 게임은 현대적인 서사 매체로, 비교하자면 웹툰, 웹소설, TV 드라마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매체들은 처음부터 완결을 제공하지 않고 소비자에게 서사를 조금씩 전달하면서 점점 쌓아가되, 필요하다면 서사 구성을 변경하기도 한다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이를 서사에 가변성이 있다는 것으로 표현하겠습니다.
웹툰이나 웹소설을 보면서, 우리는 작품의 서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작가가 서사를 변경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 웹 콘텐츠 작가들이 후기에서 언급하듯이, 라이브 서비스 서사를 운영하는 이들은 독자들의 동향에 맞춰 서사를 변경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서사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인식을 독자와 작가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손바닥 뒤집듯이 갑자기 서사를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작가가 서사를 언제든지 변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느냐는 사실입니다.

 

라이브 서비스 게임, 웹툰, 웹소설 모두 쌓아가는 서사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스포일러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라이브 서비스 서사의 구조적 문제보다는 태생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지극히 사업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로, 라이브 서비스 게임 서사는 게임 콘텐츠와 연관성이 깊고, 게임 콘텐츠는 다시 사업성과 연관이 깊어서 마케팅의 소재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서사의 후반에 큰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이 주요 콘텐츠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면 어떨까요? 그 사건이 드러나는 것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사업 혹은 마케팅적으로 강력한 효과를 지니는 소재라면 활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때, 소비자들이 이미 이 콘텐츠의 서사를 최근 것까지 봤다고 가정하고 접근합니다.
다소 납득이 안 가실 수도 있으나, 예를 들어 영화 호빗은 어떨까요? 다섯 군대 전투의 예고편을 보는 것만으로, 호빗 1,2편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스마우그가 없다는 사실이나, 호수의 인간들과 난쟁이, 요정들 간의 사이가 결국 틀어진다는 것 등이 스포일러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감수하지 않으면 광고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전작을 봤을 거라고 가정하고 광고하는 것입니다. 라이브 서비스 게임 역시 같은 것이죠.

두 번째는 특히 게임의 경우, 플레이어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여 그들 간의 스포일러가 빈번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온라인 게임은 플레이어 간의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이 게임의 흥행과 지속성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채팅을 제공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곳 채팅에는 동시에 수백수천 명이 참여하는 실시간 대화의 장입니다. 그리고 거기 참여하는 플레이어들의 게임 서사 진행도는 천차만별이며, 대화를 주로 이끌어 나가는 대상은 게임에 익숙한 플레이어입니다. 즉,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들에 의해서 스포일러가 너무나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교하자면 웹툰이나 웹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댓글로 인해 스포일러를 경험하는 것과 유사한데, 댓글은 원하지 않다면 안 볼 수도 있지만, 온라인 게임에서 채팅을 안 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최신판 홍보를 위한 이전 소비자의 스포일러는 어쩌면 라이브 서사의 숙명입니다.

 

3. 운영

  그렇다면, 라이브 서비스 게임 서사를 운영할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대중을 위한 게임을 만드는 이상, 게임 서사 역시 그들을 위한 것이어야 하므로, 대중이 원치 않는다면, 서사의 방향을 틀어야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서사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쌓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변성이 있어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서사를 운영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대중의 반응을 살펴야만 합니다.
물론 대중의 동향에 휘둘리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불만은 있는 사람만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있다면 표출하는 것이 사람의 일반적인 경향이고, 반대로 불만이 없다면 적극 칭찬하기보다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작품을 즐기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작품을 즐기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어떤 불만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대세인지 소수인지를 명확히 판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칫 잘못 수정했다가는, 소수를 만족시키려다가 다수의 대중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서사가 흘러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중의 동향을 살피고 거기에 맞게 운영하는 것

 

4. 노하우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서사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랑사가를 서비스하고, 출시된 다른 게임들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노하우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첫 번째 노하우는 먼 산 기법으로, 서술할 때 멀리 있는 산을 설명하는 것처럼 두루뭉술하게 묘사하는 방법입니다. 어떤 인물을 묘사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그의 외모나 성격, 배경, 인생 등 세부 사항 모두를 설정하고 서사를 진행하는 게 아니라, 당장 서사 진행에 필요한 만큼만 묘사한 뒤, 향후 필요할 때마다 점차 살을 붙여 나가는 방식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서사를 탄탄한 설정 기반 아래 진행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다소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이 방식이 중요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부 설정까지 하고 개발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라이브 서비스 게임을 운영하는 개발 팀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플레이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라는 것인데, 특히 다른 게임의 상황, 신작 출시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모바일 게임에서는 업데이트가 1주 미뤄지는 것조차 상당히 치명적입니다. 게다가, 게임의 본질이 서사가 아닌 게임 프로젝트가 절대다수이고, 더욱이 서사는 게임 지표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다 보니, 개발 현실은 서사 기획자에게 시간을 많이 주지 않습니다. 또한, 플레이어 역시 개발사의 사정으로 업데이트가 지연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더 잔인한 현실을 이야기하자면, 시간을 더 들여 달라고 말하는 이들조차도, 새 게임이 출시되면 주저 없이 떠납니다. 따라서, 최대한 빨리 서사를 내놓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되는 것이 먼 산 기법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서사의 가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서사는 언제든 방향을 틀 수 있는 대처가 가능해야 하지만, 만약 처음부터 완결까지 세부적인 구조를 다 만들어두었다면 어떨까요? 이 경우,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거미줄처럼 서로 뒤얽혀 있어서, 단 하나의 설정을 틀어도 연관된 모든 것을 검토해야 할 뿐만이 아니라, 개발자 자신도 해 놓은 것이 아깝다는 방어 심리를 갖게 되어, 대중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서사를 변경하기 쉽지 않게 됩니다. 즉, 가변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먼 산 기법으로 공백의 영역을 만들어두면, 설정을 치밀하게 준비하기는 어려워도 언제든 선회할 수 있는 가변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은 설정을 치밀하게 파고드는 사람보다 표면적인 서사에 집중하는 사람이 절대다수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먼 산 기법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산 기법은 그림에 비유하자면 러프 스케치 단계와 같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노하우는 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틈이란,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겨 호기심을 유발하는 장치입니다. 라이브 서비스 게임은 플레이어를 게임에 오래 붙잡아야 매출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서사가 끝을 맞이하는 순간 만족감을 얻게 된 플레이어는, 게임을 떠날 확률이 매우 높아집니다. 따라서, 플레이어를 게임에 계속 붙잡으려면 끊임없이 호기심을 유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틈은 게임 서사에의 관심을 유지하게 하는데 적합한 장치입니다. 게임 서사에 숨겨진 진실을 준비한 다음, 플레이어가 그것에 대해 추측할 수 있더라도, 게임에서 그것에 대해 확정 선언을 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라는 정도의 가능성만 제시하여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면 호기심 견인과 동시에 플레이어 간의 활발한 논의를 유도하여 커뮤니티 역시 강화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성은 완결까지 독자를 끌고 가야 하는 근래의 만화, 애니메이션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모두가 너무나도 궁금하지만 절대로 알려주지 않는,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의 주인공 미도리야 이즈쿠의 아버지에 대한 것이라거나, 귀멸의 칼날에서 주인공 탄지로 가족과 태양의 호흡의 창시자 간의 관계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탄지로의 귀걸이에서 촉발되는 '틈'은 서사 최후반부까지 호기심을 견인합니다.

 

  세 번째 노하우는 서사의 결말보다는 과정에서 오는 재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라이브 서비스 게임의 서사는 스포일러에 취약하여, 결말에서 오는 재미를 추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런 단점을 반대로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결말이 스포일러 되더라도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을 궁금하게 만들어 과정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결말에서 오는 재미가 '어떻게 이런 결말이'라는 느낌이라면, 과정의 재미는 '도대체 왜 저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결말은 한 문장으로도 쉽게 스포일러가 되지만, 전체 과정은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는 이상 스포일러 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워크래프트 3의 경우, 로데론의 왕자 아서스가 리치왕으로 타락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이라서 워크래프트를 잘 모르는 사람조차도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가 어떤 성격과 배경을 가지고 어떤 일 때문에 타락했는지 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서스의 타락이 알려져 있을 것이라고 상정하고, 그것에 이르는 과정을 궁금하게 만든다면, 조금 더 호기심을 오래 견인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웹툰에서는 대표적으로 덴마에서 이 방법을 사용하곤 했는데, 이 웹툰에서는 A.E.라는 에피소드로 다음에 전개될 서사의 결말을 미리 보여준 다음, 어떤 경위로 거기에 이르게 되었는지 풀어주는 방법을 활용하곤 했습니다.

 

이 이미지 하나로 아서스의 타락은 스포일러 되었지만, 아서스 서사의 재미는 타락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오는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 노하우는 곁콘텐츠 활용입니다. 게임에서 메인 서사를 진행하는 콘텐츠는 보통 메인 퀘스트이며, 이 콘텐츠는 한번 추가될 때 새로운 지역 및 인물과 시네마틱 컷신 등 매우 많은 물리적 리소스를 요구합니다. 이렇게 값비싼 콘텐츠이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는, 서사를 추가할 수 있는 업데이트의 빈도도 매우 낮다는 것입니다. PC 게임은 보통 1년에 1~2회 정도 메인 서사를 추가하며, 모바일 게임도 MMORPG 같은 장르는 3~4개월에 한 번이 한계입니다. 그래서 메인 서사를 메인 퀘스트에만 의존하려 하면, 서사의 진행속도가 매우 더뎌질 뿐만이 아니라 가변성도 낮아지는 문제가 생깁니다.
하지만 다행히 게임이라는 매체는 다른 서사 매체들과는 다르게 활용할 수 있는 곁콘텐츠가 무궁무진합니다. 게임 내에는 서브 퀘스트나 각종 던전, 업적, 아이템의 플레이버 텍스트와 같은 다양한 콘텐츠가 있으며, 게임 외적으로는 공식 포럼이나 동영상 플랫폼을 활용한 추가 서사 콘텐츠까지, 게임이기 때문에 활용할 수 있는 곁콘텐츠가 매우 많습니다. 따라서, 서사에 대한 동향이 바뀌어서 방향을 틀어야 하는데 당장 틀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면, 이런 곁콘텐츠에서 먼저 대응하는 것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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