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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창고_게임/레벨 디자인

[고찰] 반복 컨텐츠에서의 랜덤의 중요성

반복 컨텐츠에서의 랜덤의 중요성

by Dreamrugi


1. 이 글이 시작된 이유

 PC 온라인 게임에서도 마찬가지 였지만, 컨텐츠 기획자에게 있어서 '반복해서 해야 하는 컨텐츠'의 기획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플레이어들이 수십 번, 아니 어쩌면 수백 번 반복하게 될 이런 컨텐츠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 중요도가 낮고 반복 횟수가 높은 경우

- 중요도는 높으나, 반복적인 경우


 전자의 경우는 모바일 게임 일일 과제나 PC 온라인 게임의 일일 퀘스트 정도를 들 수가 있겠는데, 이런 컨텐츠들은 '시간이 짧다'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다소 반복적으로 보이더라도 플레이어들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문제는 후자입니다. PC 온라인 게임의 공격대, 던전 등의 컨텐츠 및 리니지2 레볼루션의 시공의 균열 같은 경우인데, 반복적으로 플레이해야 하지만, 플레이 타임이 길고 높은 집중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전자에 비해 반복에 의한 피로도, 지루함이 월등히 높습니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군단 확장팩에서의 인스턴스 던전들

모든 던전을 신화 난이도로 돌 수 있는 시기가 되면 이 모든 던전들을 매일 돌아야 하는데, 각각의 던전이 높은 피로도를 가지고 있어 반복적으로 돌 경우 대단히 지루하고 지치게 됩니다. 그 동안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많은 풀의 던전을 확보해놓고 무작위 매칭을 이용하여 지루함을 해소해 왔습니다.


 그 동안 많은 게임이 이런 점을 감수하면서 높은 비용을 들여 후자의 던전을 만들어 왔지만, 고민을 거듭하여 반복의 지루함을 상쇄시키는데 성공한 게임들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게임들을 직접 플레이한 결과 그 열쇠가 '랜덤성'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였고, 이 점을 기억하기 위해 이렇게 글로써 정리해 보았습니다.



2. 반복 컨텐츠의 위험성

 먼저 반복적인 것을 왜 최대한 해소해야 하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고 정면으로 맞서야만

제대로 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으므로 굳이 정리해보려 합니다.


가. 반복 컨텐츠는 '예측 가능'해지며 이는 '지루함'을 유발합니다.

  심리학적으로 봤을 때, 인간은 모든 것을 '패턴화' 시켜서 기억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인스턴스 던전들이 정해진 순서를 따라 진행하는 '일방향성 구조'를 띄고 있고, 그 구조가 언제나 동일하다면, 즉 패턴화 되어 있다면 플레이어들은 한 두번만 플레이해도 그 구조를 쉽게 기억할 것이며 이는 같은 던전을 다시 플레이 했을 때 던전의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할 수 있게 되어 이미 정답을 아는 수학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처럼 지루해지게 될 것입니다.

     

나. '과정'이 힘들다면 보상을 얻기도 전에 '이탈'하게 됩니다.

  보통 반복 컨텐츠들은 확률에 의해 '최종 보상을 드롭' 하는 형태이거나 1회 당으로 나눠진 보상을 꾸준히 얻어야 하는 '숙제'입니다. 전통적인 온라인 게임은 전자의 경우인데, 운이 좋으면 단번에 매력적인 보상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심리는 컨텐츠를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만, 이 과정이 지나치게 길어지면 기대감보다도 지루함이 더 강력한 힘을 얻게 되고, 이는 결국 보상을 얻지 못한 채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소수 플레이어만이 보상을 획득하는 것이 의도라면 상관없지만, 최종적으로 모든 플레이어가 보상을 얻어야 하는 컨텐츠라면 이는 사실상 '실패한 기획'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모바일 게임들의 경우는 후자의 경우로, 확률로 획득할 수 있던 최종 보상을 매일 일정량 배분해서 지급하는 경우입니다. 100이라는 수치를 가진 매력적 아이템을 매일 1씩 지급하여 총 100회를 반복하게 만드는 형태인 것이죠. 전자에 비하면 지속적인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가시적으로 보이는 노력의 양, 즉 '100번을 돌아야 한다'라는 압박감은 "지겨워 죽겠다"라는 생각과 "하루라도 가지 않으면 손해다"라는 생각까지 더해져서 장기적으로 봤을 땐 컨텐츠, 나아가 게임 자체를 질려 버리게 만듭니다.


다. 지속성이 낮은 반복 컨텐츠를 만드는 것은 '비용 낭비'입니다.

  기간과 비용이 한정되어 있는 개발 현장에서, 분명하게 '반복'해서 플레이하게 될 컨텐츠를 지루함 해결을 위한 그 어떤 해결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고비용으로 제작하는 것은 '지루함에 의한 빠른 이탈'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비용 낭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위 내용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반복 컨텐츠를 기획할 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래처럼 정리될 수 있습니다.


 - 지루함을 유발하는 예측 가능성을 제거하자.

 - 최종 보상을 얻을 때까지의 매우 긴 과정을 버티게 만들자.

 - 비용 대비 최대 효율을 낼 수 있도록 반복 컨텐츠를 설계하자. 



3. 참고할 만한 게임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반복의 지루함을 상쇄시키는데 성공했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노력을 한 게임, 컨텐츠들이 이미 있습니다. 우선 이러한 게임들의 장단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 디아블로 3

  핵 앤 슬래시 MORPG의 대표주자 디아블로 3는, 전작에서부터 '던전 구조 랜덤 생성'을 통하여 매번 게임 월드에 입장할 때마다 레벨 구조를 새로 생성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방식은 레벨을 여러 개의 블럭(모듈)로 만들고, 각 모듈 간의 접합 가능 부위를 데이터로 기록한 다음, 월드 생성 시마다 블록들을 재조립하여 플레이어에게 매번 새로운 경험을 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만능처럼 보이는 이 방식에도 약점은 분명 존재합니다. 강점과 약점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강점

ㆍ매 게임 입장 시마다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다.

ㆍ적은 비용으로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

      

2) 약점

ㆍ매번 줄 수 있는 경험의 차이가 미비하다.

ㆍ블럭은 구조적으로 어떤 특징 없이 '평이'해야 한다.

ㆍ경험을 완벽히 조절할 수 없다.


즉, 간단히 정리하면 반복의 지루함을 타파하는 대신, '평범함'을 택하는 전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방식이 MO에서만 가능한 것인가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던전을 인스턴스화 시키는 현재 RPG에서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전략입니다. 대표적으로 마비노기를 들 수 있습니다.

    

※ 디아블로3 1막의 지도 일부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듈호 되어 있는 구조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위 지도를 예로 들면, 3개 정도의 모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 모듈들은 정사각형 모양으로 각각의 모듈을 떼어 내서 다시 다른 형태로 재조립해도 딱 들어맞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재조립하게 되면 경험이 완벽하게 달라 지진 않지만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그런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죠.


나. 마비노기

  넥슨의 장수 게임 마비노기는 대부분의 컨텐츠 흐름이 '던전'에 묶여 있습니다. 던전을 통해 레벨업을 하고 중요한 생산 재료 혹은 강화 재료를 얻거나 희귀한 의상을 획득할 수도 있습니다. 즉, 필연적으로 던전 컨텐츠가 매우 높은 반복성을 띄게 되어 있는데, 초기 마비노기의 던전들은 이를 디아블로 3와 같은 '던전 구조 랜덤 생성'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더 많은 랜덤 요소를 추가하여 그야말로 랜덤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는 던전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래는 초기 던전의 랜덤 요소들을 하나씩 정리해본 것입니다.

  

1) 구조 랜덤 생성

  앞서 디아블로3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마비노기 역시 던전마다 구조를 새로 생성합니다. 이는 마비노기가 MMO임에도 던전은 인스턴스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이 구조를 사용하기 때문에 게임 내 연출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연출 요소는 주로 컷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 마비노기의 던전 지도

각각의 모듈이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는 디아블로3와는 달리, 마비노기는 각 모듈의 구조는 동일하게 하되, 그 안의 플레이 패턴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2) 랜덤으로 정해지는 각 '방'의 완료 조건

  디아블로3가 레벨 구조만 재생성하고 그 안의 플레이는 모두 같았다면(등장한 몬스터의 처치), 마비노기는 거기에 한 술 더떠서 방마다 여러 개의 플레이 패턴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랜덤 배치하게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구조가 매번 바뀌더라도 큰 새로움을 느끼긴 어려웠던 디아블로 3와는 달리, 마비노기는 한층 더 높은 수준의 다양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3) '상자'를 통한 몬스터 랜덤 출현

  방에서 만날 수 있는 플레이 패턴 중 하나입니다. 방에 들어서면 플레이어는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상자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잠긴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얻기 위해서는 상자를 열어 열쇠를 획득해야 합니다만, 이것은 상자를 열면 등장하는 몬스터를 모두 처치해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자를 열어서 등장하는 몬스터'입니다. 플레이어는 상자를 열기 전에는 어떤 몬스터가 등장할지 알 수 없는데이때 플레이어는 '심리적 긴장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번역했던 가마수트라 글, '문 뒤에 무엇이 있을까'에 의하면, 플레이어의 두뇌는 이 시기에 위험이 다가올 것으로 예상 되는 다음 상황, 즉 상자를 열었을 때의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서 '준비된 상태'가 됩니다.  다시 말해 '극도의 집중 상태'가 된다는 것으로 게임에 '몰입'하게 된다는 의미이죠. 이 부분이 어느 지점을 가던 예측 범위 내의 몬스터가 달려드는 디아블로 3와 매번 상자를 열 때마다 등장하는 몬스터, 패턴 조합이 다른 마비노기 간의 극명한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랜덤 속의 랜덤이라고 할 수 있죠.         

         

※ 마비노기 피오드 던전의 상자 방

던전 몬스터의 패턴 중에는 플레이어들이 명확히 마주치기를 꺼려 하는 몬스터들이 존재합니다. 매번 상자 방에서 상자를 열 때면 무의식 중에 '제발 그 몬스터만은 나오지 않기를'이라며 심리적 긴장상태를 유지한 채 상자를 열게 되고, 이것이 곧 집중/몰입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죠.


4) 운을 시험하는 '구슬 방'

  마찬 가지로 방에서 만날 수 있는 플레이 패턴 중 하나입니다. 방에는 굳게 닫힌 문과 불이 꺼진 4개의 구슬이 위치해있습니다.이 중 3개는 몬스터가 등장하는 구슬이며, 1개는 문이 열리는 구슬이고, 정답은 매 방마다 재설정됩니다. 이 역시 '랜덤 속의 랜덤 요소' 및 두뇌의 '준비된 상태 유발 요소'로써, 구슬이라는 랜덤 요소에 의해 매 던전 공략 시마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단순히 몬스터가 등장하는 것이 아닌, '구슬을 친다'라는 '유저 행동'에 의한 '준비된 상태' 로 인해 높은 몰입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거기에 몬스터를 처치하지 않고 지나가는 짜릿함까지 더해져 말그대로 '재미'를 만들어 냅니다.

        

※ 마비노기 키아 던전의 구슬 방            

          

5) 숨어있는 미믹을 찾아라! '미믹방'

  방 뿐만 아니라 방과 방을 연결하는 길에서도 만날 수 있는 플레이 패턴입니다. 역시 랜덤 속의 랜덤으로, 무수히 많은 상자 중에 단 1개만이 열쇠를 가진 상자이고, 나머지는 '미믹 몬스터'가 둔갑한 것이죠. 미믹은 플레이어의 두뇌를 준비된 상태로 만들기에는 위협도가 다소 낮지만, 이 역시 매 던전 진행 시마다 사소하지만 다른 경험을 만들어내어 반복에 의한 지루함을 덜어 줍니다.

         

※ 마비노기 키아 던전의 미믹 방

방 모서리에 있는 4개의 상자 중 1개만이 진짜 열쇠 상자이고 나머지는 미믹이다.


6) 희귀한 아이템이 든 상자를 찾아라! '중간보상 방'

  랜덤 요소로 몬스터 등장(벌)만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보상'에 의한 랜덤 요소 역시 존재합니다. 앞서 이야기 했던 구슬방에선 구슬에서 몬스터가 등장할 경우 몬스터가 '보물상자 열쇠'를 떨어 뜨립니다. 이 열쇠는 추후 던전 중반에 들어서면 등장하는 일명 '중간보상 방'에서 상자를 열 때 사용됩니다. 이 방에서는 이제까지 획득한 열쇠를 이용하여 상자를 열어 보상을 획득할 수 있는데, 일정 확률로 이 상자에서 희귀한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이런 이유때문에 구슬방에서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닌 몬스터가 등장하길 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랜덤 속의 랜덤'인 것이죠.

         

※ 마비노기 키아 던전의 중간 보상 방

현재는 어떨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중간 보상 방에서 쓸만한 인챈트 스크롤이 등장하여 구슬방에서 오히려 몬스터가 나오길 원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7) 자신 있다면 운을 시험해봐! '분수'

  마비노기의 랜덤 속의 랜덤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던전을 진행하다보면 만날 수 있는 '분수'가 바로 주인공입니다. 던전 중반 즈음에 만날 수 있는 이 분수는, 일정 확률로 플레이어에게 이로운 혹은 해로운 효과를 부여합니다. 물론 그 분수의 효과를 볼 것이냐 말 것이냐는 온전히 플레이어의 몫이죠. 분수는 운이 좋으면 체력 또는 스테미너의 완전 회복이나 장비의 축복(내구도 감소량 저하)을 걸어주기도 하지만, 정반대의 효과를 보여줄 때도 있습니다. 던전 전체적으로 보면 이런 요소가 그렇게 큰 효과를 보이진 않으나, 이런 소소한 요소가 반복 수행해야 하는 던전에서의 작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죠.

         

※ 마비노기 분수의 해로운 효과의 예 : 배고픔

마비노기에서는 공격에 소모되는 스테미너 외에도 스테미너의 최대치를 정하는 '배고픔' 수치라는 것이 있는데, 위 이미지의 경우는 캐릭터의 배고픔 수치를 0으로 만들어 스테미너 최대치를 0으로 만들어 버리는 효과입니다. 음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겠죠!


8) 보상 조차 너의 운에 달렸다' 보상방'

  마비노기 던전에서의 랜덤은 던전이 종료되는 순간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최종 보스를 처치하면 각 플레이어는 최종 보상방의 상자 중 하나를 열 수 있는 '열쇠'를 받게 되는데, 이 열쇠로 8개의 상자 중 하나를 열 수 있습니다. 어떤 보상을 받게 될 지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죠. 비록 실제로는 각 상자에 보상이 지정되어 있지 않고 열 때 확률이 정해지는 시스템일 수도 있으나, 단순히 남이 뽑아 주는 것이 아닌, '유저가 직접 선택한다'라는 행위 자체에 반복의 지루함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 마비노기의 최종 보상 방

보상이 미리 지정된 것이 아닌 상자를 열 때 랜덤을 돌리는 구조라 할지라도, 플레이어는 괜히 다른 사람의 상자에서 더 좋은 것이 나오면 '내가 저 상자를 열었어야 해'라는 아쉬움을 가지게 되고, 이런 감정 하나하나가 게임의 재미를 형성한다.


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그렇다면 디아블로나 마비노기 같이 던전 레벨을 완전히 재조립하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인가 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블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이런 랜덤성을 가진 인스턴스형 던전을 리치왕의 분노때 최초로 시도했으며, 가장 최근에 출시한 확장팩, 군단에서는 눈에 띄게 이런 시도들이 많이 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겠습니다.


1) 보랏빛 요새

리치왕의 분노에서 최초로 등장하여 군단 확장팩에서 리뉴얼되어 등장한 이 던전은, '감옥의 죄수를 이용하여 공격하려는 악의 무리'라는 것이 주요 컨셉입니다. 던전에 진입하면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다양한 보스들을 볼 수 있으며, 도시를 침공한 적들은 일정 단계 진행 시마다 임의의 죄수 중 하나를 해방시키고, 그를 처치하는 보스전이 전개됩니다. 플레이어는 매 던전 진행 시마다 다른 보스를 만나게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반복 수행으로 인한 지루함을 타파하려 한 것이죠. 컨셉적으로도 대단히 좋은 방법이지만, 여기엔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만들어야 할 보스가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던전 제작 작업을 진행하면 일반 전투 구간보다도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보스전인데, 랜덤으로 구성할만큼 이용 가능한 보스 풀을 많이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공수가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보스전의 깊이를 낮게 할 수도 없는 것이, 던전에서 플레이어가 주로 기억하고 핵심 재미로 꼽는 것이 보스전이기 때문에, 효과는 좋으나 과정이 현실적이지 못한 유형이 되겠습니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보랏빛 요새

이미지에서 보이는 보랏빛 장막으로 가려진 방 하나 하나에 보스들이 수감되어 있습니다. 던전을 진행하면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적장이 임으의 방을 선정하여 그 안에 갇혀 있는 죄수를 풀어주는 식으로 보스전이 진행됩니다. 


2) 용맹의 전당 : 펜리르

군단 확장팩의 인스턴스 던전 중 하나인 용맹의 전당에는 '펜리르'라는 늑대형 보스가 등장합니다. 이 보스는 다른 보스와는 달리 독특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초기 등장 위치가 매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펜리르는 동굴 또는 사냥꾼들의 천막 둘 중 한 곳에 최초 등장하며, 펜리르가 있는 곳은 그의 '발자국'을 통해 추측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제외하면 크게 달라지는 점이 없기 때문에 사실 차이를 크게 느낄 순 없으나, 블리자드가 저비용으로 던전에 랜덤성을 주려고 한 시도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군단의 용맹의 전당에서 펜리르의 발자국

발자국이 향한 위치에 따라서 펜리르의 최초 위치가 달라진다. 하지만 그 뿐, 보스 자체의 패턴이 달라 진다거나 플레이어의 플레이 형태가 크게 달라지진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3) 별의 궁정

용맹의 전당과 마찬가지로 군단 확장팩에서 추가된 인스턴스 던전입니다. 이 던전의 특이한 점은 바로 '미니 게임'의 존재입니다. 최종 보스 직전까지 진행하고 나면 플레이어들은 파티 초대객으로 위장해서 파티에 숨어든 적을 찾는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플레이어들은 파티에 참석한 하객들과 대화를 하면서 적의 외모에 대한 단서를 찾게 되고, 이 단서를 종합하여 최종적으로 적을 발견, 던전의 다음 단계로 진행하게 되는데, 이 때 적의 외모가 매 던전마다 다르게 설정되어 매번 단서를 새로 종합해야 합니다. 단순히 발자국으로 위치만 찾던 용맹의 전당에 비해서 훨씬 플레이어블한 형태로 풀어낸 것으로 다소 번거롭다는 동향도 있지만, 랜덤성과 미니게임을 통해 지루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시도한 경우입니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군단의 별의 궁정

파티에 참여한 하객 NPC들과 대화하여 수상한 자에 대한 단서를 수집하여 숨어있는 적을 찾는 미니게임입니다. 단서는 외모에 대한 것으로 제공됩니다. 옷차림 같은 것이죠.


4) 비전로

  역시 군단에 추가된 인스턴스 던전입니다. 이 던전은 던전의 구조가 '원형 고리 구조'를 띄고 있는데, 매 던전 진입시 마다 시계 또는 반시계 방향의 문이 닫혀 플레이어는 매번 랜덤으로 지정되는 동선을 따라 던전을 진행하게 됩니다. 이 던전의 경우는 용맹의 전당이나 별의 궁정처럼 플레이어가 어떤 퍼즐을 푸는 것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임의로 지정된 랜덤을 받아들여 수행해야 하는 형태입니다. 디아블로3의 던전 구조 랜덤 형성 방식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군단의 비전로 지도

지도를 자세히 보면 길목 중간중간에 자물쇠 걸린 문 표시가 있는데, 저 지점이 이번 던전에서 닫힌 길입니다. 매 던전마다 어느 길목이 닫힐지 임의로 지정되기 때문에 동선이 계속 바뀌게 되는 것이죠.



4. 랜덤성귀찮음의 사이

  여기까지만 보면 랜덤성은 반복 컨텐츠의 지루함 해소의 만능 열쇠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분명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귀찮음'이죠! 만약에 랜덤 요소가 조금이라도 귀찮음을 유발하는 요소가 있다면 거기에 반복이라는 것이 더해져 거대한 마이너스 효과를 일으키게 될 것이고, 이것은 결국 최종 목표로 삼을 보상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플레이어를 조기에 이탈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로 어떤 것들이 귀찮음을 유발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저는 크게 2가지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랜 시간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과 '플레이어를 기다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먼저 첫 번째 경우는 주로 '퍼즐'과 같은 것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해야 하는 컨텐츠들은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집중해서 오래 하고 싶은 컨텐츠이기 보다는 가능한 빨리 끝내고 싶은 컨텐츠(이미 가본 곳이기 때문에)이며, 그렇다는 말은 이 컨텐츠를 플레이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빨리 진행하고 싶은 의지가 충만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시간을 들여 고민을 해야 하는 퍼즐이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음은 빨리 진행하고 싶어서 급해 죽겠는데 정답을 찾기 위해선 침착하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될 것이고, 주어진 상황과 플레이어 마음의 불일치는 귀찮음짜증을 유발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런 부정적인 경험은 기억 깊숙이 남게 되어 다시 이 던전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귀찮고 짜증나서 가기 싫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되고 이것은 곧 이탈로 이어지겠죠!


  두번째 경우는 '패턴 혹은 시스템적인 이슈'로 인해서 플레이어를 강제적으로 기다리게 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플레이어의 의지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라는 것에 있습니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던전 중 보랏빛 요새를 실제로 플레이해보면 각각의 보스 사이에 일반 몬스터가 몰려오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때, 몬스터들은 직전 무리가 전멸하고 나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몰려오게 되어 있는데, 이 '일정 시간'은 플레이어가 관여할 수 없는 시간이라서 플레이어들이 넋을 놓고 기다려야 하는 순간입니다. 아마 이 던전의 기획자는 플레이어가 다음 무리가 올 때까지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의도였을테지만, 결국 이 시간은 플레이어들이 보랏빛 요새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기억하는 부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단 던전 랜덤 매칭에서 보랏빛 요새가 걸리면 "아 또 기다려야 되네"라는 생각부터 들게 만드는 것이죠.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다시 한 번, '플레이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라는 점입니다. 차라리 동선이 긴 던전이었다면 플레이어가 속도 물약을 사용하거나 이동속도 증가 기술을 사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상황을 어느정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덜 귀찮을 겁니다. 따라서 보랏빛 요새의 던전 기확자는 일정 시간동안 무조건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원할 때 다음 단계로 진행할 수 있도록 구성했어야 하는 것이죠.


  앞의 두 가지 경우를 보면 공통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시간'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반복 컨텐츠라는 것은

플레이어들에게 있어서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은 일일 숙제'이기 때문에 반복 컨텐츠를 기획할 때는 시간적인 부분을 대단히 민감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랜덤성을 구성할 때 역시 그 랜덤성이 어떤 형태로든 플레이어들의 시간을 과도하게 잡아먹지 않아야 하고, 시간을 요구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비노기의 구슬방의 경우, 분명히 그냥 몬스터를 잡고 지나가면 상자방보다 시간을 많이 소비하게 만들 것처럼 보이지만, 잡아야 하는 몬스터의 최대량이 상자방과 동일하기 때문에 정말 운이 없어서 꽝이 3번이 나오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비전로 역시 매번 동선이 달라질 뿐이지 시간적인 면에 있어선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으며, 랜덤성이 어느 한 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던전 전체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설사 정말로 이것으로 인해 시간이 차이가 나더라도 그 차이를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정리하면 반복 컨텐츠에서 랜덤성을 구성할 때는 귀찮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아래 사항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 플레이어가 고민해야 하는 형태를 지양한다.

- 플레이어가 시간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 없어야 한다.

- 무의미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순간이 없어야 한다.



5. 리니지 2 레볼루션에서 시도했던 것들

  리니지 2 레볼루션을 서비스하면서 이런 랜덤성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서비스 10개월 정도 된 시점이었습니다. 시공의 균열 컨텐츠의 출시와 함께 내놓은 피의 여백작 침소를 기획하던 당시에는 아직 이런 랜덤성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 했기 때문에 그런 시도를 할 생각조차 하지 못 했고, 반 년이 넘게 지난 지금은 매 도전이 아무런 변화 없이 예측가능한 지루한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 리니지2 레볼루션의 피의 여백작 침소 보스 '트리샤'

피의 여백작 침소는 기획자로써 처음 제작해본 던전이었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아직은 랜덤성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 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대단히 예측 가능한 일방향성 적인 패턴, AI로만 구성되었고, 심지어 일부 구간에서는 플레이어가 시간을 통제할 수 없는 구간까지 들어갔다. 대단히 아쉬운 점이 많이 남았던 던전.


  이후에 랜덤성의 중요함을 깨닫게 된 것은 3가지 계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시공의 균열이 라이브에서 플레이 되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고 직접 플레이도 해보면서 스스로 랜덤성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었고, 두 번째는 레볼루션의 컨텐츠들 대부분이 게임 본연의 재미 중 하나인 '랜덤의 재미'를 많이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대표 님의 조언으로 느낀 것이었으며, 마지막으로는 휴식 기간 동안에 많은 게임들을 접하면서 새삼 랜덤성(특히 예측 불가능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피의 여백작 침소 이후로 기획했던 두 번째 시공의 균열, '창조의 신전'에서는 최대한 랜덤성의 재미를 살려보려 시도했습니다. 이전 시공의 보스였던 레오나드와 트리샤가 항상 정해진 순서를 계속 돌기만하면 AI구조 였다면, 디케와 하기오스는 기본 기술 뿐만 아니라 특수 패턴 까지도 랜덤화시켜서 플레이어가 보스들이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예측할 수 없게하여 항상 긴장하도록 만들었고(이 부분 때문에 보스의 AI를 작업하는 시간 및 야근이 기존 대비해서 2배 이상 늘어난 것 같습니다. 하하하) 원소 관리자의 전당에서는 마비노기의 '구슬 방' 패턴을 도입하여 플레이어가 직접 가젯을 조작하여 매번 달라지는 정답을 선택하게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료 기획자들의 기획에도 이런 랜덤성에 대해서 많이 의견을 전달하고 있으며 다음 시공의 균열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비전로 형태의 동선 랜덤화를 고도화한 형태를 시도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 리니지2 레볼루션의 창조의 신전

    최대한 다양한 곳에서 랜덤성을 주려 시도했던 던전, 던전 플레이 패턴에 대한 피드백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랜덤성이 의도대로 동작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원소 상성 패턴은 어렵다는 동향이...!), 피의 여백작 침소에 비하면 여러모로 발전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6. 마무리하며

  아무래도 플레이 자체보다는 보상에 플레이어들의 초점이 맞춰지는 온라인 게임의 특성 상 플레이 자체에 대한 피드백이 많이 없기도 하고, 이런 랜덤성이 전에 없던 UX라서 혼동스러워 하는 플레이어들도 있지만(특히 원소관리자의 전당의 랜덤), 이런 작은 랜덤성 하나하나가 모여서 조금이라도 덜 지루한 게임 플레이를 만들거라 믿으며 계속해서 도입을 시도해볼 생각입니다.


온라인 RPG 게임에서 반복성은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그렇다면 그 숙명을 그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끊임없이 개선하려 하는 것이 컨텐츠 기획자의 의무라고 해야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