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오프라인 RPG게임의 '역할'의 차이 고찰
by Dreamrugi
※ 위쳐3 대표 이미지(상)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대표 이미지(하)
이 2장의 이미지가 온라인 RPG와 오프라인 RPG의 역할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1. 시작하기 전에
지난 RPG의 정의에 대한 고찰을 하면서 새로 발생한 의문이 있습니다.
- MMORPG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국산 게임이 외산 게임보다 흥행(일부 예외는 있지만...)
- 예술성을 인정받았으나 장기 흥행에 실패하는 온라인 게임도 다수
국/외산 MMORPG들 중에는 예술성이나 참신함을 인정받으면서도 장기 흥행에 실패한 게임이 여럿 존재합니다. 이런 게임이 앞서 고찰했던 것처럼 역할에 대한 집중이 부족해서 실패한 것일까요? 직접 플레이해본 경험으로는 소홀히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성공했다고 하는 다른 게임보다 역할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시스템이나 컨텐츠, BM 구성 차이일 수도 있겠으나, RPG의 정의 고찰 중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온라인 RPG에서의 역할과 오프라인 RPG에서의 역할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위의 가정을 중심으로, 성공하고 장수하는 온라인 RPG들과 그렇지 못한 것들의 '역할' 차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오프라인 RPG에서의 역할과 경험
먼저 오프라인 RPG에서 추구하는 경험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플레이어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프라인 게임 중, 위쳐나 헤일로, 라스트 오브 어스와 같이 크게 흥행하여 명성을 떨친 게임들을 살펴보면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의 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완성된 시나리오를 제공합니다."
이것은 플레이어를 시나리오 속 주인공으로 탈바꿈하여 마치 자신이 게임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데, 역할극이 본질인 RPG에서 이 부분은 대단한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소설, 만화, 영화 등과 같은 컨텐츠들과 유사한 경험이기도 하죠. 이런 오프라인 게임들이 제공하는 경험들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 한 편의 잘 짜여진 문학 컨텐츠를 즐긴듯한 경험
- '완결'이 정해져 있는 끝맺음이 있는 경험
이런 이유 때문에 오프라인 RPG에서의 역할은 소설이나 연극 속의 주인공 같은 어떤 인격이 있는 특정인으로 정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정해진 혹은 기구한 운명이 있는 이야기 속 주인공 같은 역할을 맡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엘더스크롤의 드래곤본이라는 운명을 지닌 종족 단위에서부터 위쳐의 게롤트라는 인물에 한정되기도 합니다.
※ 호평받고 있는 게임, 젤다의 전설 : 브레스 오브 와일드
젤다의 전설 역시 플레이어는 '링크'라는 인격을 가진, 이야기 속 주인공과 같은 인물의 역할을 맞게 되며, 종국에는 어떤 이야기의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3.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온라인 RPG를 보기 전에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아래쪽에 있는 욕구를 충족해야만 위쪽에 있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사회적 욕구와 존경의 욕구입니다.
보통 게임에 대한 욕구를 이야기할 때는 존경의 욕구에 의해 발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단계에는 주로 자존감이나 성취욕이 있는데, 어떤 이야기를 읽는다거나 퍼즐을 맞추는 것 등도 성취욕을 얻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존경의 욕구를 이야기하기 전에 한 단계 더 아래로 내려가 보면 사회적 욕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현실 세계 속의 가족이나 친구 등에 의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존경의 욕구를 추구할 수 있게 되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입니다.
※ 19.02.10 추가사항
마이어스의 심리학에 의하면, 최근 사회적 욕구는 단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으로써 모든 단계에 기저로 깔려 있는 독립적인 욕구로 봐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회적 욕구는 그 중요성이 훨씬 커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사회적 관계를 추구한다는 것이죠. 아직 그렇다고 심리학계에서 정확히 결론을 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하 글에서는 계속 3단계 욕구로 간주하겠습니다.
4. 온라인 RPG 게임에서의 역할과 경험
그렇다면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를 통해 온/오프라인 게임의 차이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요? 앞서 욕구 피라미드를 이야기하면서 사회적 욕구가 이미 충족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오프라인 게임이었다면 게임 내에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될 일이 적기 때문에 존경의 욕구를 중심으로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완성함으로써 성취감을 얻는 형태의 성취감을 얻는 것이죠.
※ 19.02.10 추가사항
게임 내 캐릭터와 사회적 관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일부 매니아층도 분명히 있으며, 이를 타겟으로한 게임들도 많습니다. (연애 시뮬레이션이나 아이돌 마스터 계통의 게임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원래는 사회적 관계가 형성될 일이 없어서 존경의 욕구만을 추구한다고 썼던 부분을 적어서 중심으로 추구한다는 식으로 변경했습니다.
그러나 온라인 게임은 오프라인과는 다소 다른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됩니다. 플레이어가 게임이 온라인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게임 내에서 다른 플레이어들을 실제로 보게 되기 때문에 사회적 욕구를 추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욕구때문에 파티나 길드 같은 커뮤니티형 시스템이 잘 동작하는 것이지요. 플레이어가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고 가정하고, 온라인 RPG 속에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했다면 다시 존경의 욕구를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오프라인 게임에서의 존경의 욕구 외에 새로운 성격의 존경의 욕구가 발생합니다. 바로 온라인 게임에서 형성했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입니다.
즉 온라인 RPG 에서는 문학 컨텐츠를 즐기는 것과 같은 경험 외에도 플레이어간의 집단 형성과 집단 내외에서 인정받는 형태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게임 속 역할 역시 인격을 가지기 보다는 캐릭터가 나라는 정체성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모든 플레이어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온라인 MMORPG를 시작하면 주변 지인이든, 게임 속 새로운 인연이든, 사람들을 찾아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려 합니다. 그 과정을 성공하면 그 집단 속에서 인정받고 싶은, 존경의 욕구를 추구하게 됩니다.
5. 분석
그렇다면 이제까지 고찰했던 것을 바탕으로 왜 예술성 있다고 평가됐던 게임들이 온라인에서는 성공할 수 없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플레이어들이 흔히 말하는 예술성이라는 것은 문학적 예술성의 성격을 많이 띕니다. 멋진 주인공과 감동적인 시나리오가 있는 게임이죠. 그러나 이런 게임들이 온라인으로 바뀌면 치명적인 약점이 생기게 됩니다.
-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취약.
- 게임 캐릭터가 '나'가 아닌, 감정 이입을 위한 다른 존재로 인식.
- 개인적 존경의 욕구가 충족되면 그 즉시 게임을 이탈.
예를 들어, NC소프트의 리니지와 블레이드 앤 소울을 비교해보겠습니다. 누가봐도 문학적 예술 측면에서는 블레이드 앤 소울의 손을 들어줄 것입니다. 홍문파 막내로써 복수를 하고 문파를 재건하는 이야기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결말을 맞이했을 때 게임 속에서 사회적 욕구를 추구, 충족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은 마치 오프라인 게임을 플레이 했던 것처럼 성취감을 맛보는 즉시 게임을 이탈하게 됩니다. 또한 플레이어 각자가 유일무이한 홍문파 막내라는 역할은 다른 유저와의 사회적 관계를 유도하는 역할은 아닙니다. 때문에 그런 류의 게임들보다 사회적 관계 형성 유도 측면이 취약한 것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탈하지 않는 플레이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게임 속에서 형성한 사회적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과 성취감을 맛볼 컨텐츠가 없을 때까지 하려는 사람일 것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로 치자면 전자는 PVP를 즐기는 이들이고 후자는 업적이나 레이드를 즐기는 이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 블레이드 앤 소울의 홍문파 NPC 일원
블레이드 앤 소울이 조금 더 MMORPG의 장점을 살리려 했다면, '나는 홍문파의 최후의 생존자'가 아니라, '우리는 홍문파의 최후의 생존자'로 풀었어야 되지 않을까요?
반면에 리니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전반적으로 문학적 예술성을 어필하기 위해 공을 들인 부분은 보기 어렵습니다. 아덴을 모험하는 모험가라는 역할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피로 맺어진이라는 뜻의 혈맹 컨텐츠는 플레이어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도록 유도하여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 줍니다. 또한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혈맹 간의 친/반목과 관계 변화를 유도하는 많은 컨텐츠들을 구성하여 존경의 욕구, 특히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여 플레이어가 개인 혹은 집단적으로 게임을 지속적으로 플레이하게 만듭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라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호하고 상대적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없으며 어느정도 충족한다고 하더라도 그 만족감 때문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사회적 관계에 기반한 것들이 플레이어가 문학적 경험을 끝내 혼자만의 성취감을 얻었더라도 게임에 지속적으로 잔류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 19.02.10 추가사항
심리학에는 자이가르니크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완성 과제에 대한 기억이 완성된 과제에 대한 기억보다 더 우수한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프라인 게임에서 제공하는 것과 같은 개인적 성취감들은 모두 완성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고, 그것을 완료했을 때는 긴장이 풀리면서 그 게임을 기억에서 잊어가게 됩니다.
반면에 사회적 관계와 같이 모호하고 상대적인 것은 절대적이지도 않고 불변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서버에서 1등을 했다가도 잠깐 돌아선 사이에 순위가 바닥을 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부분 때문에 온라인 게임들이 오프라인보다 지속성을 가진 것은 아닐까요?
※ 컨텐츠를 혈맹 간의 반목을 통한 존경의 욕구 충족(여러 혈맹 사이에서 우리 혈맹의 돋보임)에 초점을 맞춘 리니지.
10년이 넘는 초장수 게임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발성으로 끝나는 개인적 존경의 욕구와 달리, 집단/개인 간의 존경의 욕구의 충돌은 무한한 플레이 원동력을 만듭니다.
또 하나의 사례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와우는 문학적 예술성과 사회적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고 있는 사례로 볼 수 있는데, 그게 가능한 것은 '종족 연합의 일원'이라는 역할 덕분인 것으로 보입니다. 와우는 퀘스트나 레이드 컨텐츠 등에서 영화와 같은 문학적 경험을 잘 전달하면서도, 그 경험 속에서 '우리 모두는 종족 연합(얼라이언스, 호드)의 일원으로 전우다'라는 것을 내세워서 한 연합 내의 플레이어를 단합시킵니다. 또한 전장과 같은 RVR 컨텐츠는 자신의 강함을 표현하여 존경의 욕구를 충족하면서도 같은 연합 플레이어들 간의 유대감을 강화합니다. 이로써 플레이어는 굳이 같은 길드에 속해 있지 않더라도 같은 진영 플레이어들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어 사회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생활에서도 와우를 하는 사람끼리 만났을 때 서로가 같은 종족연합이면 유대감을 느끼고 다른 소속이면 묘한 경쟁심을 느끼게 하는데, 그만큼 와우의 역할 몰입이 잘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가 맡는 역할에 플레이어 자신이 아닌 다른 인격이 부여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캐릭터 그 자체가 온전히 플레이어 스스로일 수 있습니다.
※ 호드 혹은 얼라이언스라는 공동체 안에서 플레이어들은 간접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이런 관계는 종족연합 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더 끈끈한 관계로 발전합니다.
6. 결론
- MMORPG는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의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합니다.
- MMORPG의 컨텐츠는 사회적 관계를 기반으로 한 존경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야 합니다.
- MMORPG에서의 역할은 역할 그 자체가 인격을 가지거나 게임 내 세계에서 유일무이해선 안 됩니다.
주의할 것은 MMORPG에서 문학적 예술성을 추구해선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와우처럼 문학적 예술성을 추구하면서 사회적 욕구도 충족시켜줄 수도 있으며, 이것이 보다 많은 플레이어들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니, 궁극적으로 MMORPG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닌가 싶습니다. 단지 적어도 MMORPG를 만들 때는 문학적 예술성을 추구하기 위해 게임 속 사회적 관계를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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