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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창고_게임/게임 철학

세팅 전략 게임의 재미와 BM의 딜레마

생각의 시작

 

"그랑웨폰이 어느 정도 쌓이니 그때부터 재미있었습니다."

 

  그랑사가에 콘텐츠 팀장으로 재직하던 시기, 어느 기획자분께서 플레이 후기에 써주셨던 말입니다. 당시에는 세팅 기반의 게임에서는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몇 개의 게임, 특히 AFK 저니를 해보면서 이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보게 됐습니다. 오늘은 이에 대해 생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세팅 기반의 전략 게임

  앞서 세팅 기반의 전략 게임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간단히 생각을 맞춰 보겠습니다. 게임의 장르를 구분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습니다. 하지만 RPG에서는 전투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전투 장르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시뮬레이션이냐 액션이냐 논타겟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획자들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이야기합니다. 바로 그 전투에서 유저가 어느 포인트에 재미를 느끼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장비나 기믹 요소의 활용 없이 유저가 순수하게 자신의 반응 속도와 컨트롤로 승부를 볼 것인지와 같은 것입니다.
이때, 세팅 기반의 전략이라는 것은, 전략성을 기반으로 재미를 얻는 것의 일종으로,  전투에 진입하기 전에 캐릭터, 팀, 덱에 스킬, 장비 등을 세팅하며 전투 결과를 예측하면서 재미를 얻는 장르를 말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TCG나 캐릭터 수집형 게임들을 떠올리면 됩니다.

 

전투 전에 덱을 세팅한다는 점에서 TCG/CCG 장르는 세팅 기반 전략의 표본입니다.

 

캐릭터 조합/장비 시너지를 미리 고려한다는 점에서는 붕괴 스타레일도 동일합니다.

 

 

세팅 기반 전략 게임의 전략 풀

  세팅 기반의 전략 게임의 재미는 이름 그대로 전투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전에 세팅을 고민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두고 내가 조합한 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지를 고민하면서, 적의 전략에 대응하여 어떤 조합을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원소, 직업, 무기 등의 상성이나 캐릭터간 스킬 시너지로 많이 느껴집니다.

따라서 전략 풀을 얼마나 보유했느냐는 게임의 재미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배치할 수 있는 전략 풀이 많을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것, 고민해볼 수 있는 것이 많아지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패배를 맛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하지만 전략 풀(캐릭터, 장비)의 보유량은 재미에 큰 축을 담당합니다.

 

 

개발자의 딜레마 : BM

  그러면 그저 유저에게 충분한 전략 풀을 제공하기만 하면 될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게임이 과거의 TCG처럼 패키지 형태였다면 모르겠지만, F2P(Free to Play, 무료 플레이)가 기본이 되어버린 현 시대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우선 무료로 게임을 시작할 수 있어야 게임은 충분한 유저 수를 확보할 수 있으며, 게임과 회사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매출이 필요하기 때문에 전략 풀은 보통 과금 요소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매출을 생각하여 캐릭터를 풀지 않으면 무과금 유저가 게임을 버틸 수 없으며, 캐릭터를 많이 풀자니 매출이 하락하여 게임을 존속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수많은 게임 회사가 이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합니다. 어떤 회사는 과금 유저만 타겟하겠다고 선언하고 과감히 캐릭터를 얻는 방법을 과금으로 제한하기도 하고, 어떤 회사는 캐릭터를 최대한 풀어주되 성장 시간을 지연시켜 성장 재화로 매출을 연결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내는 지는 장기적으로 게임의 경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칩니다.

 

재미의 축인만큼 니즈가 가장 크기 때문에 보통은 그냥 BM(보통 뽑기)에 바로 연결합니다.

 

 

AFK 저니의 경우

  AFK 저니를 처음 접했을 때는 꽤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약 1개월의 출석으로 기본 캐릭터 풀을 모두 지급한다는 것입니다. 캐릭터를 충분히 보유하면 신규 캐릭터의 니즈가 감소하기 때문에 이것은 매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입니다. 실제로 AFK 저니 디렉터 인터뷰를 보면 그들도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큰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게임의 장기 존속, 즉 유저의 장기 안착을 위해서는 전략 풀 제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지급을 결정한 듯 합니다.

 

AFK 저니가 한국에 출시된 후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직접 체감해보니 이것이 확실히 장단점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든 종족별로 기본 전략 풀을 주니 캐릭터가 충분하여 확실히 무엇을 해도 할만하긴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 뒤로 캐릭터가 연달아 출시되었지만 특별히 니즈가 느껴지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저는 게임에 과금을 꽤 하는 편인데도 말입니다).

AFK 저니를 보면 캐릭터 뽑기 외에 매우 많은 BM 요소가 있습니다. 배틀패스는 처음부터 2개가 있고 상점에 가면 무수히 많은 성장 패키지가 유저를 현혹하며, 소위 스마트 팝업이라고 말하는 구매 팝업이 시도 때도 없이 화면에 나타납니다. 추측컨데, 이렇게 과도한 BM을 펼쳐 놓은 것은 캐릭터 무료 지급으로 인해 매출이 감소한 것에 대한 증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FK 저니가 글로벌에 먼저 출시됐는데 그렇게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는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이런 생각에 더욱 힘을 줍니다. 물론 진실은 실제 매출 지표를 보고 있는 그들만이 알겠지만 말이죠.

 

AFK 저니의 결정이 좋은 것이었냐고 하면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초월/한계돌파를 요구하는 게임 구조상 결국 캐릭터를 여러 번 얻어야 하고, 뒤로 갈수록 이들 영웅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해지는데, 신규 캐릭터 천장은 보유 캐릭터 등급으로 막아놔서 결국 신규 캐릭터를 얻으려면 과금이 강제되기 때문입니다. 즉, 한 마디로 정리하면 조삼모사였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니케처럼 그만큼 상시 뽑기권을 더 많이 제공하는 쪽이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대단해보였지만, 지금은 결국 조삼모사였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F2P 기반의 세팅 전략 게임을 만들겠다면 이 딜레마는 언제까지고 해결되지 않을 숙제인 것 같습니다. 늘 그렇듯이 정답은 없습니다. 그저 이 게임이 어떤 방향을 추구하고 싶은지에 달려 있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게임 기획자의 역할이고 그것을 고민하는 것이 게임 기획의 꽃이 아닐까라는 것 역시 다시금 생각합니다. :-)

 

자, 그러면 우리는 또는 여러분의 게임은 어떤 방향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은 결국 유저에게 어떤 경험으로 와닿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