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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창고_게임/게임 철학

게임의 재미에서 중요한 것은 콘텐츠

시작하기 전에

  게임 업계에서 기획자로 일을 시작하면 많은 사람들이 겪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해서든 기존에 없었던 새롭고 참신한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증입니다. 저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최근 이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게임의 재미는 어디에서 올까?

  우리는 게임을 재미를 위해서 합니다. 우리는 게임을 할 때 어디에서 재미를 느낄까요? 보통 많은 개발자가 이 답을 매커니즘(혹은 시스템, 규칙)에서 찾고는 합니다. 참신한 전투 시스템, 성장 시스템, 장비 시스템과 같은 것을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 짜는 모습은, 게임 개발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것이 게임의 재미 중 하나라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것만이 답일까요?

 

 

매커니즘의 한계

  위의 질문과 관련해서 제가 내린 결론은 매커니즘 유일한 답은 아니며 심지어 그것이 이상적인 답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결국 익숙해진다

게임은 일종의 놀이입니다. 여기서 매커니즘이 하는 역할은 어떻게 놀 것인지를 정하는 규칙입니다. 즉, 놀기 위한 준비이지 놀이 자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신한 규칙은 처음에 익힐 때는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재미는 딱 익숙해질 때까지입니다.

 

늘 새로울 수 없다

만약 어떤 놀이가 기존에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만들어냈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새로운 장르의 탄생입니다. 물론 이것은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통을 동반하며 엄청난 운 역시 따라주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게임사가 저마다의 장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멋지겠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새로운 학습은 피곤하다

규칙이 바뀌었다는 것은 새로 학습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회사에 가면 그곳의 규칙에 다시 적응하느라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는 것처럼, 게임의 규칙을 새로 학습하는 것이 반드시 즐겁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게임은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인데, 그것을 위해 학습이 선행되어야 한다면 많은 이들이 게임을 포기할 확률이 높습니다.

 

TRPG의 재미는 일단 규칙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시작된다

 

 

익숙함 속의 새로운 재미 : 콘텐츠

그래서 우리는 익숙함(혹은 기존의 매커니즘) 속에서 새로운 재미를 줘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많은 스포츠 경기는 수십 혹은 수백 년동안 같은 규칙으로 이어져 내려왔지만, 아직까지 전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놀이입니다. 4년마다 개최되는 월드컵은 규칙이 바뀐 적이 없지만 언제나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경기 내용도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 역시 스릴러, 로맨스, 코미디, 액션, 히어로물 등 기존 장르의 규칙 속에서 무수히 많은 인기작이 탄생했습니다. 그들은 같은 규칙 안에서 저마다의 스토리, 플롯, 연기자들을 가지고 매력을 어필합니다.

수많은 유튜버와 버튜버는 동일한 영상 플랫폼, 방송의 형태 속에서 각자만의 매력을 어필하여 두각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어떤 새로운 규칙이 아닌 그들 자체에 매료됩니다.

 

즉, 결국 중요한 것은 바로 콘텐츠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장르나 규칙에서 재미를 느끼기보다는, 기존의 규칙 속에서 새로운 콘텐츠로 재미를 느끼는 것에 더 익숙합니다. 따라서 게임 개발 역시 재미를 추구할 때 새로운 매커니즘을 찾기 위해 매몰되기 보다는 콘텐츠에 집중해야 합니다.

 

재미에 매커니즘 변화가 필수라면 시스템 변화가 거의 없는 IP 프랜차이즈의 흥행을 설명할 수 없다.

 

마치며

다년 간 게임 업계에서 일하면서 느낀 게 있다면 생각보다 이 업계가 콘텐츠 기획을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스템, 밸런스, 전투, 성장 시스템에 열을 올리는 것에 비해서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는 그만큼 관심과 힘을 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콘텐츠 기획은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인식이 그것을 대변합니다. 이것은 비단 회사 뿐만이 아니라 구직자에게서도 쉽게 드러납니다. 많은 기획자의 포트폴리오가 재미있는 콘텐츠보다는 시스템에 많이 치중되어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마 성장과 강함에 치중되어 발전해온 한국식 MMORPG로 인해 생긴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일본과 중국 게임에 잠식되어 가는 현 한국 게임 시장의 상황은, 주 소비층이 성장과 강함보다는 콘텐츠에 매료되는 세대로 변했지만 개발사는 거기에 발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행히 블루 아카이브, 니케, 피의 거짓처럼 이런 상황에서도 변화를 일으키는 곳들이 있으니, 거기에 뒤처지지 않게 발 맞춰야 겠다는 생각을 해보며 이번 글을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