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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창고/조직관리론

게임 기획 주니어를 위한 조언

1. 시작하기 전에 

  그 동안 많은 주니어, 기획자 지망생 분들을 만나면서 그분들께 공통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문제는 너무나 기본적인 부분에서 발생하는 것이라서, 보통 제가 운영하는 팀에 들어오신 분들께는 가장 먼저 지적해드리고는 하는데, 저와 접점이 없는 분들께도 부디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내용을 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자~ 그럼 하나씩 조언을 살펴 볼까요?"

 

2. 빵과 제빵사 : 맛을 모르면 맛있게 만들 수 없다.

  백종원의 골목 식당 방영 초기, 백종원 님께서 모 식당 사장님께 드렸던 질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식당을 차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음식점을 다녀보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때 식당 사장님이 하셨던 대답은 '파스타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맛있는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행되어야 할까요? 좋은 재료 선별? 최신식 제빵기 구매? 빵 굽는 법 배우기? 정답은 바로 '빵의 맛에 대해 많이 아는 것'입니다. 맛도 모르는데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임 개발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선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요? 기획서 작성법 공부? 게임 엔진 숙련? 액셀 기능 습득? 아마 무슨 말인지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네,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재미있는 게임에 대해 많이 아는 것'입니다. 게임 엔진, 기획서 작성, 액셀 기능 같은 것은 그 다음 문제일 뿐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식당 사장님과 같은 답변이 주니어를 넘어서 시니어에게도 많이 발견됩니다. 가령, JRPG 풍의 모바일 CCG 기획자를 채용하는 면접 자리에서 위와 같은 질문을 하면, 'JRPG 별로 안 좋아한다' 혹은 'CCG 많이 안 해봤다'는 답변을 하거나, 심지어 '모바일 게임을 잘 안 한다'고 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설사 거짓말을 하더라도 게임의 구조나 기획 의도에 대해 질문하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여 들통나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은, 툴이나 문서 작성법을 공부하기 전에, 자신이 지망하는 게임 장르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혹은 얼마나 좋아하는지 먼저 고민해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지점이 잘 전달되었다면, 행여 게임 엔진을 한 번도 안 다뤄봤고, 문서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면접관은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장르에 대한 이해도, 애정, 경험이 없다면 문서가 완벽하더라도 떨어질 수 있습니다.

 

"모바일 게임을 안 좋아하신다고요?"

 

3. '나' 사용 설명서 : 무엇을 잘하고, 하고 싶은가.

  주니어 기획자의 이력서, 포트폴리오를 보면 '아, 확실히 주니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이든 다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다고 어필하는 것이며, 이런 경우, 포트폴리오 역시 시스템부터 시작해서, 시나리오, 레벨, 전투, 퀘스트까지 섭렵합니다. 그러나 막상 면접에서 '무엇이 하고 싶으세요'라고 질문을 드리면 보통 '잘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앞선 사례는 한 가지 사실을 시사하는데, 주니어 기획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할 수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력서에 지망 분야를 모든 분야로 기재했거나, 포트폴리오가 모든 분야를 겨냥한다는 것에서 확실히 드러납니다. 이것을 보면 면접관은 '이 사람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서 다 썼구나'라고 판단합니다.
게임 회사에서 TO가 발생하는 과정은 어떻게 될까요? 기획은 분야가 매우 세분화되어 있습니다. 밸런스, 전투, 시스템, 레벨, 시나리오... TO는 이 분야를 기준으로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서, 레벨 기획 파트의 일손이 부족하다면, 레벨 기획 TO가 발생하여 레벨 기획자 구인을 시작합니다. 게임 기획은 평생 한 분야만 연구해도 부족할 정도로 깊이가 깊습니다. 따라서, 구인할 때 그 방면에서 잔뼈 굵거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가능성이 높은 인재를 찾습니다. 그런데, 이력서와 포트폴리오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혹은 해봤다'고 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무엇이든 다 하겠다고 어필하려 했겠지만, 오히려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여 기피 하는 이력서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지 알고, 그것을 강점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력서, 자기 소개서, 포트폴리오에 잘 드러나면서, 면접에서 '자신을 사용하는 설명서를 말해주실 수 있나요'라고 질문했을 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사의 인재 채용은 게임의 파티원 모집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어있는 포지션에 맞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죠. 탱커를 구하고 있는데, 뭐든지 다 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과연 함께하고 싶을까요?

 

4. 본질 :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게임 개발의 본질이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재미는 매우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아무리 흥행한 영화도 별점 10점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재미가 취향에 따라 완전히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획안의 이유를 '재미 있으니까'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받아 들여지지 않을 확률은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많은 포트폴리오가 '이게 재미 있으니까'라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본질로 놓고 기획서를 작성해야 되는 것일까요?

 

  게임 회사도 영리 기업입니다. 수익이 있어야 직원에게 월급을 주며 새로운 게임이나 업데이트를 내놓을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게임을 추구하는 것조차도 그것이 유저에게 잘 팔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따라서, 기획서의 목적이 재미에만 국한되어선 안 됩니다. 재미가 부가 되고 영리 기업이 추구할만한 것을 앞으로 내세워야 의사결정권자가 납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상품성(과금 상품, 흥행 스타일), 생산성(제작 기간 대비 효율), 편의성(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기업에 어떻게, 왜, 얼마나 이득이 되는지 입니다. 이것을 기획에선 흔히 기획 의도라고도 부릅니다.
많은 기획자가 명작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도전하지만,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본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상위 욕구를 추구할 수 없는 법입니다. 기업이 인력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며, 그것이 충분히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재미도 추구할 수 있는 법입니다. 잔인하지만 대중 게임을 개발하려는 기획자라면 절대로 잊어선 안 될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항목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한 줄로 정리하면, 재미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재미만 생각해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점점 커지는 게임 제작비 매출을 생각하지 않으면 게임도 개발할 수 없습니다.

 

5. 직업 윤리 :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직업 윤리는 이 직업을 선택한 사람이 갖춰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그런데, 학교, 학원, 집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회사에서도 이런 직업 윤리에 대해 알려주는 곳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가장 기본적인 윤리 두 가지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급여를 받고 일하는 것의 의미로, 저는 이것을 손을 판다로 비유하곤 합니다. 게임 기업에서 사람을 채용하는 의미는 달리 말하면 우리가 원하는 게임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으로, 여러분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게임 기획자가 꿈꾸던 게임을 개발하는 것을 희망하지만, 그 꿈이 의사결정권자, 나아가 기업의 오너가 원치 않는 방향이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만약 회사가 망한다면, 급여를 받던 사람들은 이직하면 그만이지만, 기업의 오너는 모든 책임을 지고 파산에 직면해야 합니다. 이렇듯, 책임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에 의사결정권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오너와 자신의 방향이 달라서 함께 할 수 없다면, 그때는 오너의 책임에 도전하는 것보다 이상이 같은 오너를 찾아 이직하는 것이 옳습니다.

 

  두 번째는 대중 게임 개발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대중 게임은 말 그대로 대중, 즉, 과금을 하고 게임을 즐기는 유저를 위한 상품을 개발하는 것으로, 이 지점이 회사에서 입사 전과 후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이 정도면 됐겠지?"라는 마음으로 끝마치거나, 자신에게 관대해져서 문제를 외면해선 안 되며, 돈을 받고 파는 상품이라는 생각을 하고 개발에 임해야 합니다. 만약 핸드폰을 구매했는데 표면에 흠집이 있다면 당연히 기분이 나빠서 환불을 요구하는 것처럼, 게임 유저 역시 과금하고 즐기는 게임에 하자가 있다면 환불을 요구할 권리 역시 있습니다. 따라서, 회사에서 만드는 게임이 단순히 나의 만족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저를 위한 것임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페이트 그랜드 오더로 시작된 트럭 시위 계속되어 발생하는 시위들을 보면서, 이 모든 게 직업 윤리의 부재의 영향이 아닐까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