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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창고/조직관리론

피터의 법칙 : 관리자의 역할

1. 시작하기 전에

  주니어 시절에 시니어 동료가 해주신 조언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파트장을 새로 선임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후보자 선정 방식에서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고, 이에 대해 시니어 동료가 '역랑에 있어서 실무자로써 요구받는 것과 관리자로써 요구받는 것은 다르다'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년의 시간이 흘러 관리자가 되고 나서 돌아보니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됐는데, 문제는 이 사실이 제게 극심한 정체성 혼란과 고민을 안겨줬습니다. 팀장에서 슬슬 회사에서 프로젝트 디렉터에 준하는 역할을 요구받고 있던, 조직 내에서의 제 역할에 대해 혼란을 겪고 있던 이 시기에, 당시 디렉터 님께서 커피를 한 잔 마시자고 하시며 여러 가지 좋은 조언을 해주셨는데, 그것을 토대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몇 년이 흘러 마침내 관리자 역할에 대한 몇 가지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게임 업계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업계에서 많은 사람이 경력이 쌓이면 실무자를 넘어서 관리자의 역할을 요구받기 시작합니다. 이 거대한 역할 변화를 잘 적응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좋거나 나쁜 관리자가 되기도 하는데, 제가 찾은 해답이 관리자 역할을 맡게 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2. RnR(Role and Responsibility)

  관리자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해하고 지나가야 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RnR(Role and Resposibility), 이 용어는 조직에서 어떤 사람, 부서, 직위별로 수행해야 하는 역할과 책임을 의미합니다. 수많은 사람으로 이루어진 조직이 어떤 업무를 진행할 때 사람별로 역할과 담당 범위를 구분하는 개념으로, 만약 RnR을 정리하지 않은 채 업무를 진행하면 한 업무를 여러 사람이 동시에 진행하거나, 확인이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누가 처리해야 하고 누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모호하여 업무에 혼선이 생기는 등 심대한 생산성 저하를 일으킵니다.

 

RnR을 정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직위에 따른 정리입니다. 사람들을 직위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조직에서 실무자관리자로 나눌 것입니다. 실무자는 이름 그대로 현장에서 실제로 업무를 진행하는 사람이며 관리자는 다수의 실무자 관리하며 이끄는 리더입니다. 앞선 이 한 문장에 앞으로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으니 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느 조직에서든 RnR을 이야기할 때 해적선을 예시로 들고는 합니다. 해적선은 망망대해에 위치한 보물섬을 찾아 수많은 사람이 한배를 탄다는 측면에서 좋은 비교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적선에서 실무자와 관리자는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요? 실무자는 배를 움직이기 위해 손발로 뛰는 사람들로, 이를테면 조타수, 요리사, 갑판원, 포수 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리자는 누가 있을까요? 이번에는 이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1등 항해사가 있을 것이며 갑판원을 통솔하는 갑판장과 이들 전체를 움직이는 구심점으로 선장이 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관리자들은 손발로 뛰어다니는 사람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바다와 배의 상황에 맞춰서 여러 명의 선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움직이며 배의 규율을 정하며 선원들이 손발을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만듭니다. 어떤 갑판장도 직접 갑판에 기름칠을 하지 않으며 선장 역시 직접 대포를 조준하여 발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각자 맡은 역할이 있고 그 역할에 대해 최선을 다하며 다른 일은 그것을 맡은 역할에게 책임과 함께 일임하는 것을 RnR의 기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 : 이 수많은 선원들에게는 각자가 맡은 역할과 책임이 있습니다.

 

 

3. 피터의 법칙

피터의 법칙을 만든 피터 J 로렌스

 

승진은 승진 후보자의 승진 후 직책에 관련된 능력보다는 현재 직무 수행 능력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승진자는 현재 직무 수행 능력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직책까지 직위가 올라가게 되고,
결국 무능하게 된 상태로 고위직에 있는다고 한다.

 

  피터의 법칙은 학자 피터 J 로렌스가 1969년에 출간한 책에 나온 개념입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조직에서 고위직 사람들이 무능한 사람들만 앉아 있는 이유에 대해서 위와 같이 풍자했다고 합니다. 보통은 이 말이 다소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현재 직무 수행 능력을 인정받아서 승진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피터의 법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현재 직무 수행 능력을 배제하라는 것은 아니며, 이 말의 진의는 현재 직책과 승진 직책의 RnR이 달라지는 경우, 달라진 RnR에 대한 승진 후보자의 역량을 고려했는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피터 J 로렌스는 이 사회 전반이 거기까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글에서 피터의 법칙을 언급한 것은 정말 이 사회가 그것을 고려했는지 안 했는지를 따지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 법칙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이제 막 관리자가 됐거나 이미 됐지만 변화된 RnR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피터의 법칙의 당사자가 다른 누가 아닌 바로 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누구도 무능한 관리자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관리자가 된 우리의 역할은 대체 무엇이고 무슨 일을 해야 잘하는 것일까요? 그저 늘 하던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피터의 법칙 : 구성원은 자신이 무능력해지는 수준까지 승진한다

 

 

4. 1차 정체성 혼란 : 나쁜 관리자로 빠지는 길

  저의 경우를 돌아보면 게임 업계에서 말하는 파트장 역할을 하는 동안은 정체성 혼란을 겪지 않았습니다. 한국 게임 업계에서 파트장의 RnR은 선임 작업자(Senior)와 유사하며, 의사결정이나 일정 권한이 부여되지 않고 다른 실무자의 업무를 보조하며 고품질 결과물을 생산하는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팀장 역할부터 극심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업무 컨펌을 요청하는 사람에서 여러 사람에게서 컨펌을 요구받는 사람이 되며, 부여받은 일정을 맞추는 사람에서 여러 사람의 일정을 편성하고 조율하는 하는 사람이 되고, 작업을 받는 사람에서 개개인의 역량과 성향을 파악하여 업무를 분장하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불만을 쏟아내는 사람에서 여러 사람의 불만을 들어주고 해결해 줘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실무자에서 관리자로 역할이 변화해서 발생하는 일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역할이 변화하는 그날 즉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혹시 기존에 비해서 할 일이 늘어났다는 생각만 하셨나요? 아마 관리자를 처음 경험하거나 아직 역할 변화를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기존에 하던 일에서 관리 업무가 추가되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입니다. 경력 실무자들에게 그동안 경험했던 최악의 관리자를 뽑는 설문조사를 하면 언제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유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실무를 하는 관리자입니다.

관리 업무는 도저히 실무를 병행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저곳 회의에 불려 다니는 것이 비일비재하며, 회의 없이 우리 팀만을 관리한다고 해도 팀원이 5명이라면 1명당 30분씩 피드백을 해도 3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무까지 하게 된다면 담당하고 있는 팀이 관리되지 않기 시작합니다. 실무자는 피드백을 받지 못해서 손 놓고 기다리기 시작할 것이며, 팀 일정은 관리되지 않아서 프로젝트 전체 일정에 병목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또한 팀원들이 불만이 쌓여도 해결해 주지 못하며 팀은 리더가 없어서 아무도 길을 제시하지도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 형태로 표류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왜 관리자가 실무를 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제가 겪어오고 봐온 바에 의하면 그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왜 나쁜 관리자가 되는 것일까요?

 

4-1. 역할 변화 미인지

이제 막 관리자가 된 많은 사람이 이전까지는 관리자 역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조직에서 승진 대상자에게 관리자 업무를 맡길 것임을 미리 통보한다고 해봤자 몇 주 전이며, 미리 통보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자신의 역할 변화 인지 부족으로 조직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이제 막 관리자가 된 사람들이 이전까지 해왔던 것처럼 관성적으로 실무를 하기 마련이며, 설령 관리자가 되는 순간 실무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람도 잘 없거니와 말해주더라도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와닿지가 않습니다.

 

4-2. 실무 욕심

역할이 전과 달리 바뀌었다는 것은 인지하더라도 실무자 시절부터 해왔던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게임 개발을 포함한 전문직 대부분이 그 직업의 실무가 좋아서 업계에 뛰어든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누군가를 관리하고 조직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나서서 무언가를 이뤄내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관리자가 되는 순간 꿈꿔왔던 것과 다르게 실무를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까지 실무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이직자 면접을 보다 보면 이전 회사에서는 관리자였으나 실무가 하고 싶어서 직책을 내려놓고 연봉을 깎아서라도 이직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보이며, 시니어 경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실무가 하고 싶어서 승진을 거부하는 사례도 빈번히 발생합니다.

 

4-3. 직접 나서는 성향

관리자가 되는 사람들은 실무 역량이 뛰어나서 승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관리자는 실무자보다 실무 능력이 뛰어난 경우가 많으므로 자신의 역량을 실무자에게 전수하여 팀의 성장을 도모해야 하나, 실무자의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했을 때 그들의 인큐베이팅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라고 선언하며 직접 처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당장은 일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과적으로는 팀의 장기적인 성장 가능성을 저해하는 행위이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입니다. 해적선 선장이 갑판 청소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본인이 직접 갑판을 닦는다면, 해적선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며 갑판장과 갑판원은 선장이 또 나타나서 개입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혼나지 않기 위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5. 2차 정체성 혼란 : 나는 쓸모없는 인간인가?

  위와 같은 이유들로 관리자가 된 사람은 자신이 수 년 혹은 수십 년 동안 해왔던 실무자 역할이 이제 끝을 맺었으며 더는 실무를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나 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동안 자신의 자존감을 높여주었고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게 해주었던 일들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갑자기 바꾸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선택 조건이 아니라 관리자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며 좋은 관리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자 가장 큰 걸음입니다.

역할 변화를 인정하고 이제까지의 자신을 버렸다고 해도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바로 지금부터인데 이전까지의 역할을 내려놓는 순간 관리자는 그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었던 엄청난 상실감, 허무함을 경험하면서 정체성 혼란을 겪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직접 자신의 손으로 소프트웨어를 기획하고 프로그램 코드를 작성하고 각종 툴을 이용해 비주얼을 만들면서 성취감을 얻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보람을 느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무를 놓으면 이제부터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갑작스레 자신이 이 조직에서 쓸모없는 인간이 된 듯한 자괴감이 찾아옵니다. 이전의 정체성을 내려놓는다는 거대한 첫걸음을 간신히 내디뎠지만, 좋은 관리자로 거듭나기 위한 길 앞에는 여전히 또 하나의 거대한 협곡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역할 변화를 인지했을 때의 첫 느낌. 그것은 압도적인 정체성 혼란입니다.

 

하지만 우울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이 공허함을 관리자로써 해야 할 일을 통해 채우다보면 금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관리자 역할이 실무자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할 일이 많고 머리를 많이 써야 하며 스트레스 역시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6. 관리자로써의 마음가짐

  그렇다면 관리자는 실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냥 실무자의 컨펌 요청이 들어오면 의견만 전달하면 되는 컨펌 기계인 것일까요? 이번 단락에서는 제가 관리자 역할을 하면서 좋은 지침이 되어 주었던 몇 가지 기조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6-1. 비전 제시와 계획 설계

  '일을 하는 사람에서 일을 만드는 사람으로' 이 말은 팀장과 디렉터 역할 사이를 오가며 업무를 하며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던 제게 당시의 디렉터 님이 해주셨던 조언입니다. 팀장급 이상의 관리자를 맡는 순간 찾아오는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웬만해선 누구도 나에게 업무를 지시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또한 무엇은 어떻게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도 정해주지 않습니다. 관리자는 아기 새처럼 내려오는 일을 받고 있던 입장에서 이제 어미 새가 되어야만 합니다.

관리자는 최대한 멀리 봐야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멀리 보고, 자신의 팀이 어디에 도착해야 하며 기한 내에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직접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자신의 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를  파악하여 누가 각각의 일에 적합한지 고민한 뒤, 일의 우선순위 및 유관부서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업무를 분장하고, 목표를 달성하기에 인원이 부족하다면 새로운 사람을 영입해야 합니다.

다소 복잡하게 들리겠지만 캐러비안의 해적 1편에서 잭 스패로우가 보물섬을 찾기 위해서 했던 일을 떠올리면 됩니다. 잭은 저주를 풀기 위해 보물섬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배와 선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를 훔치고 해적들의 마을에 찾아가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항해를 도와줄 갑판장과 각 분야별 선원들을 모집했습니다. 이후 나침반이 가르키는 방향을 참고하여 끊임없이 배를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관리자가 된 우리, 여러분은 잭 스패로우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관리자가 된 사람들이 이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실무자는 대부분 자신이 조직에서 기계 부품처럼 사용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관리자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꿈과 목표를 가지고 성취감을 얻기 위해 달리고자 합니다. 따라서 관리자는 실무자에게 단순히 업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같은 관리자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도록 명확한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해적선이든 용병단이든 함께 할 사람을 모을 때는 언제나 우두머리가 높게 쌓아올린 나무상자 위에 올라서서 다같이 이뤄 낼 장대한 장미빛 미래를 제시하는 법입니다.

 

실무자는 관리자(선장)이 방향을 제시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6-2. 조율자이자 윤활제

  일을 만들어 업무를 분장했다고 해서 결과물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제 우리는 관리하는 팀이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스타트라인에 섰을 뿐입니다. 프로젝트를 완료하기 위해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수 년에 걸치는 조직의 여정 동안에 관리자가 속해 있고 또 관리하는 조직은 적게는 수 십에서 많게는 수 백 명이 함께 움직입니다. 심지어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가 각기 다른 개개인이기 때문에 단 한 사람도 같은 성격, 가치관, 일하는 방식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일을 부여했다고 해서 조직이 알아서 잘 굴러갈 확률은 0%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다양한 사람이 모인 조직이 원활하게 움직여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적절히 조율 및 관리해야 합니다.

협업하는 과정에서 혼선이 생기지 않도록 프로세스를 확립하기도 하고, 산재되어 있는 수많은 의견을 수집 및 정리하여 비전에 적합한 것을 선택하거나, 실무자별로 상이한 업무 방식이나 일정 기준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서 조직이 한 사람처럼 움직이도록 하는 한편, 특정 실무자의 업무가 지연되면 원인을 파악하여 가이드하고 필요시 서포트할 사람을 붙이면서 도움을 준 사람에게는 적절한 보상을 지급해야 합니다. 타조직과의 불협화음이 생기면 원인을 파악하여 적절히 해결해야 하며, 팀원에게 업무 외적 케어(사적인 일로 힘들어하는 경우)가 필요하다면 그 역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관리하고 있는 조직이 원활히 움직이기 위한 것, 그것이 무엇이든 필요하다면 관리자의 업무가 될 수 있으며 이것은 정해진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리자는 자신의 조직의 성향을 파악하여 그곳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움직이면서 말 그대로 조직의 조율자이자 윤활제가 되어야만 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원활히 협업할 수 있도록 조직 체계를 정비해야 합니다.

 

6-3. 인적 관리 :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

  조직은 기계 부품으로 이루어져서 기름칠하고 연료만 넣으면 알아서 결과가 나오는 기계가 아닙니다. 팀원 하나하나는 모두 각자의 삶과 인생을 가진 사람이며, 그들은 우리처럼 누군가의 가족이며 자신만의 취미나 사생활이 있습니다. 따라서 관리자는 이를 명확히 인지하고 팀원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그들이 과도한 스트레스 받지 않도록 케어해야 합니다.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업무에 과도하게 몰두하는 사원이 있다면, 그가 자신의 건강을 희생해서 결과물을 내는 것에 흡족해할 것이 아니라 그의 퍼포먼스에 적절히 브레이크를 걸어 강제로라도 쉬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반대로 회사의 업무에 사활을 걸지 않고 정해진 기준에 맞게 주어진 업무하는 사원이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둘 이상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생기는 법입니다. 위와 같은 경우에도 전자의 사원은 나는 열심히 하는데 저 사람은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품을 수 있으며, 후자의 사원은 나는 기준에 맞춰 해야 할 일만 하고 있는데 저 사람 때문에 팀 전체의 기준이 타이트해져서 나까지 피해 본다는 불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수많은 예시 중 하나일 뿐이며 어떤 경우라도 팀원 간의 갈등이 생긴다면 관리자는 방치해두지 말고 적절히 해결해야 합니다.

저의 경우는 위와 같은 사례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언제나 팀원 각자의 퍼포먼스를 고려한 업무 기준을 명시하곤 하는 편이며, 위의 전자와 후자와 같은 사원이 있다면 전자의 사원은 강한 성장 욕구와 인정 욕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역량을 평가하여 중간 관리자로 올리거나 난이도는 높지만 성취감 역시 높은 업무를 분장하고, 후자의 사원은 개인의 삶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과도하지 않고 정량적인 업무 위주로 분장하곤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조직 개편이나 전출로 해결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원인이 되는 사원의 권고사직을 고려해야 하기도 합니다.

 

팀원들도 각자의 삶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6-4. 내가 쓸모없어지는 상황이 가장 이상적인 것

  업무를 잘 분장했고 조직이 잘 움직일 수 있도록 정비했으며 팀원들의 숙련도가 높아졌다면 갑자기 관리자의 손이 비는 순간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때 예고없이 찾아온 평화를 선사받은 관리자는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라서 자신이 쓸모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 순간 관리자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시간이 남으니 실무를 조금 해보자는 생각과 사람들이 잘 움직이나 살펴보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관리자는 언제든지 예기치 못한 업무를 만나곤 하기 때문에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실무를 잡더라도 그 일이 끝까지 잘 마무리되는 법이 없습니다. 섣불리 실무를 했다가 나중에 그것을 인수인계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실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몇 시간 혹은 길어야 하루 이내에 끝날 수 있는 가벼운 일이어야만 합니다. 또한, 굳이 의미 없이 팀원들을 살펴보려고 돌아다녔다가는 마이크로 매니징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굳이 관리자가 개입할 필요 없는 사소한 일에 참견하고 피드백을 하기 시작하면 실무자가 사소한 일까지 관리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조직의 자율성을 해치고 성장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역설적이지만 관리자가 업무에 개입하지 않아도 되어서 조직이 잘 움직이고 있는, 그야말로 관리자가 쓸모 없어지는 상황이야말로 관리자가 일을 잘 했다고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상황인 것입니다.

 

건강한 조직은 관리자의 도움이 많이 필요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손 놓고 놀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이 시간에 관리자가 할 수 있는 일을 두 가지 제안합니다. 첫 번째는 조직의 진행 방향을 더 면밀히 검토하고 계획을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시장 상황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이 해적선은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에 만날 수 있는 각종 풍파에 대비하여 끊임없이 항해 경로를 조정해야 합니다. 최근에 출시된 유사 상품에 대해서 조사도 해보고 개발 중인 것과 관련된 보도 자료나 해외 시장의 시장 상황 등 다양한 최신 정보를 수집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모자라기 마련입니다.

두 번째는 지난 경험을 포스트모템하여 경험을 조금이라도 더 내재화하는 것입니다. 경험이라는 것은 단순히 겪어봤다고 해서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라 원인, 과정, 결과, 개선 방향을 검토하여 내재화해야 비로소 진짜 나의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직전이든 먼 과거의 일이든 지난 업무 과정들을 포스트 모템하여 다음 업무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하고 그것을 우리 조직과 공유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6-5. 팀의 결과물이 곧 우리 모두의 성과

  '팀의 결과물이 곧 우리의 결과물이다'라는 말을 팀장 역할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 당시 회사 대표님께서 제게 해주셨던 말입니다. 대부분의 관리자는 실무자에서 승진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갑자기 실무를 놓고 관리자 업무를 하기 시작하면 뭔가 회사에서 정신없게 시간을 보냈고 야근까지 불사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내가 일궈낸 것이 이것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여기에 깊이 빠지기 시작하면 관리자를 하면서도 어떻게든 실무를 하려고 시도하거나 큰 박탈감을 느끼기도 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팀원의 공로를 가로채려는 행태까지 보이게 됩니다. 어떻게든 회사에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해적선이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각자 맡은 바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해적선이 마침내 보물섬을 발견하여 황금을 얻었다고 했을 때, 갑판원이 갑판만 닦았다고 해서 기여도가 없는게 아니며 갑판장이 갑판 안 닦았다고 해서 기여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조직이 말그대로 조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이익을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갑판원이든 갑판장이든 조타수든 선장이든 누구 하나라도 빠졌다가는 분명 그 해적선은 보물섬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관리자는 자신의 팀이 만들어낸 성과가 곧 자신의 성과이며 팀 모두의 성과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팀의 결과는 모두가 함께 일궈낸 것입니다.

 

7. 마치며

  과거에 몸담았던 회사의 대표님께서는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역할 놀이와 같은 것이다. 

  누가 더 위고 누가 더 아래인 것이 아니며 그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각자에게 맞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인문학이나 사회 철학서를 보면 사람은 평생 역할놀이를 하면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 가정의 자녀 역할을 하다가 밖으로 나가면 친구의 역할이나 학생의 역할이 되고, 처음 사회로 나가면 어느 회사의 사원이라는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하다가 결혼을 하면 가장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너무 비약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저는 어쩌면 피터의 법칙은 단순히 높은 위치에 무능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동물로써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역할들에 대해 그 역할을 제대로 인지하고 해내고 있는지에 대한 경고로써 받아들일 수 있지 않냐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