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기 전에
게임을 개발할 때 여러 프로젝트 및 사람과 비주얼 컨셉팅, 설정 기획을 하다 보면, 크게 두 가지 작업 방식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고증이나 현실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다소 현실과 동떨어지더라도 판타지에 집중하는 방식입니다. 게임이 이 두 가지 방향 중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개발팀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라서 불화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팀원들이 생각을 맞출 수 있도록, 각 방식의 장단점 및 적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정리해보았습니다.
2. 고증 기반
고증에 기반한 비주얼 컨셉팅, 설정 기획은 최대한 현실 세계에 기반하는 방식으로, 예를 들면, 캐릭터의 복식을 설정할 때, 실존하는 어느 문화권, 시대를 차용하고, 더 나아가면 캐릭터가 그 복식을 착용하는 시대적 배경까지 고려합니다. 지역 설정의 경우, 위도 및 경도에 따른 기후와 식생 환경까지 고려하며, 건축물은 기하학적 구조까지 고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용 게임들을 봤을 때, 이 방식은 주로 실제 역사 혹은 현실 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게임에서 많이 차용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전자는 전 세계의 역사를 탐험하는 게임, 어쌔신 크리드가 있으며, 후자는 GTA와 같은 현실 세계 기반 게임이 있습니다.
고증을 살리는 방식의 장점은, 잘 구현할수록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플레이어가 실제로 그곳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단점의 경우, 고증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여 많은 개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현실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게임의 비주얼이 개성이 없어진다는 것, 또한 고증을 잘못 차용한다면 역사 왜곡이나 문화 도용 등의 논란에 휩싸이기 쉽다는 것입니다.
3. 판타지 기반
이 방식은 비주얼이나 설정이 현실 세계로 생각했을 때 가능한 것인지, 말이 되는지 따지기보다는, 철저하게 비주얼의 재미, 게임성 측면에서 재미를 가장 우선으로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주의할 것은 이 방식이 고증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며, 비주얼의 재미나 게임성을 위해 고증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면, 건물이 다소 기하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구조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게임의 비주얼적 재미, 개성과 게임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납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방식은 우리가 익숙한 대부분의 게임에서 차용하고 있는데, 특히 게임의 비주얼이 실사와 거리가 있을수록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방식의 장점은 가능한 모든 것의 가능성을 열어 놓기 때문에 게임의 비주얼이나 설정의 개성을 무궁무진하게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단점은, 이것이 너무 과하면 게임이 다소 가볍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2010년대 후반에 한창 한국에 많이 들어왔던 중국 모바일 RPG를 예를 들면, 그래픽이 썩 나쁘지는 않은데도 게임이 지나치게 가벼워 보인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너무 과한 디자인이 게임을 가벼워 보이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 게임의 목표, 방향에 따른 선택
그럼 두 방식 중 무엇이 더 옳다고 봐야 할까요? 제가 쓰는 대부분의 글에서 항상 언급하는 것이지만, 이 주제 역시 '더 옳은 것은 없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무엇이 더 옳은지는 맞는 질문이 아니며, 우리가 해야 하는 질문은 각 방식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쓸 것인지'입니다. 만약 게임에 방향을 잘못 적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예를 들어, 어쌔신 크리드가 지나치게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다면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릴 것이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너무 고증에 치중한다면 특유의 투박하고 개성 있는 아트 느낌을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게임에 옳은 방향을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적 이슈 관점, 특히 역사 왜곡 논란이 있을 수 있는지 검토합니다.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우리는 고증, 역사를 기반으로 한다'라는 인식을 주면, 플레이어는 '게임이 고증을 얼마나 잘 살렸을까'라는 심리를 가집니다. 문제는 기대 심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게임이 사소한 것 하나라도 실제 역사와 다르게 구현했다면, 그 즉시 역사 왜곡 논란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 세계가 글로벌화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다소 관대하게 넘어갔을지 모르겠으나, 플레이어의 눈이 기본적으로 세계를 겨냥하고 있는 현대는, 사소한 것 하나조차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게임이 실존하는 역사를 기반으로 한다면 판타지를 최대한 배제하고 극한의 고증에 치중해야만 합니다.
두 번째는 아트적 관점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게임의 비주얼이 얼마나 실제와 거리가 있는지를 검토합니다. 게임 비주얼을 실제와 거리가 있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개개인마다 느끼는 느낌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실제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이유를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경험, 매력을 얻기 위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즉,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 아트를 지향하면서 고증을 살리고자 하는 것은, 그 방향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이점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 아트를 지향한다면 어느 정도 고증을 포기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반면에 게임이 실제와 가까운 아트를 지향하는 경우는 어떨까요? 우리는 무엇이든 경험했던 것을 근거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게임의 비주얼이 현실과 가까울수록 현실 세계를 참고 자료로 하여 판단한 것인데, 이 경우, 게임이 고증에서 멀어질수록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며 평가절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입었다면 움직이지 못할 갑옷, 실제로 입고 다녔다면 우스꽝스러울 디자인, 실제라고 했을 때는 지나치게 높은 채도를 가지고 있어 유치하게 보일 색상까지. 따라서, 게임이 실제에 가까운 아트를 지향한다면 가능한 많이 고증에 치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기획적 관점으로, 개발하고 있는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주고자 하는 경험이 무엇인지를 검토합니다. 앞서 예시로 들었던 두 게임, 어쌔신 크리드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각각 극한의 고증과 판타지를 선택한 이 두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어떤 경험을 주고자 했을까요? 어쌔신 크리드의 경우, 플레이어가 전 세계 곳곳의 역사 속 시간과 배경을 실제로 방문하여 탐험하는 듯한 경험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로 볼 수도, 있을 수도 없는 환상 속의 세계를 탐험하는 경험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과거에 블리자드가 어떤 인터뷰에서 '실사 그래픽을 만든다면 현실에 가까운 것을 만들 수 있지만,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므로 만들지 않는다'라고 한 것에 기인)입니다. 따라서, 어쌔신 크리드는 추구하는 경험을 위해 고증 기반이 되어야만 했던 반면에,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고증에서 멀어져야만 원하는 경험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5. 마치며
위에서 제시한 지침이 모든 게임에 천편일률적으로 모두 맞을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데포르메가 많이 되었지만 고증이 많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실제에 가까운 비주얼이지만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여 고증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추구하는 방향이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개개인이 아닌 개발하는 게임이 추구하는 방향성과 그 이유를 명확히 확립한 뒤, 개발팀 모두가 거기에 납득하고 같은 방향을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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