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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재/[자작] 블레이드 코드

[블레이드 코드] Act.1-1장 말없는 소녀 - 3화

올리버는 눈을 의심했다.

 

‘소녀… 소녀가 있어.’

 

오래 전에 버려진 이 황량한 도시에. 그것도 자연 재해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멸망한 뒤 등장한 괴물들까지 득시글거리는 세상에서 소녀 혼자라니.

 

‘아니야. 잘못 봤겠지.’

 

소년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싶어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소녀는 선명하게 보였다.

 

‘꿈이 아니야. 정말로 사람이…’

 

소년은 눈을 비비고 이 납득되지 않는 상황을 자세히 살펴봤다.

버려진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순백색 단발머리의 소녀. 나이는 10대 후반 정도 같았다. 다소 고생을 많이 했는지 피부가 거칠어 보였지만, 핏기가 느껴지지 않는 백옥 피부는 여전히 고왔다. 감은 두 눈 때문에 도드라진 속눈썹은 유별나게 길어서 그녀를 성숙해 보이게 했다.

소녀는 허리까지 오는 길이의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코트는 옷깃이 높고 후드가 달렸는데 모래바람을 피하기 위한 것이리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세라믹판으로 보강한 타이즈형 슈트를 입고 있었다.

 

외모도 옷도 평범하지 않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저건… 일렉트릭 기타?’

 

수채화 느낌의 자주색 양귀비가 그려진 일렉트릭 기타. 그녀는 얼굴 옆에 둥둥 떠다니는 부유형 원격 미니 앰프로 기타를 조율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메트로놈 같은 것은 필요 없는 듯했다.

 

소년은 마치 사막에 검은 천사가 강림했다고 생각하고는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디링…

“크윽!”

 

소녀가 줄을 튕겨 기타 소리가 울리자 자장가 같은 잔잔한 음색이 울려 퍼졌다. 거슬리지 않는 부드러운 음이었지만 올리버는 마음을 찌르는 감각을 느꼈다. 그 느낌은 고통과는 뭔가 사뭇 달라서 소년은 왠지 모를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소년이 그 느낌보다도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따로 있었다.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그것은 바로 소녀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올리버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곳에서는 아주 둔한 사람이라고 해도 조금의 인기척이 있다면 눈치챌 수 있다. 생명의 기척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이 죽어버린 땅에서는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녀는 소년에게 관심 없는 듯 오직 조율에만 몰두했다.

 

딩…

 

다시 한번 부드러운 음색이 올리버에게 닿았다. 소년은 이번에는 그 소리가 고막을 울리기도 전에 가슴에 먼저 닿았다고 느꼈다.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지독하게 시린 감각. 그는 방금 전의 소리를 듣고 확신했다.

 

‘틀림없어. 꿈속에서 들었던 소리야.’

 

 

그때 조율이 끝났는지 짧은 연주가 시작됐다.

 

딩 디링 딩 딩- 딩 딩…

 

노래는 자장가처럼 잔잔하고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슬프게 느껴졌다. 잠 못 드는 아기를 위한 것보다는 상처 입은 사람을 보듬는 듯한 음색.

 

“으윽…”

 

연주가 시작되자 소년의 가슴 시린 감각이 점점 심해졌다. 처음에는 불쾌하다는 기분만 들 뿐 싫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예고 없이 소년의 감정에 변화가 찾아왔다.

 

‘연주를 멈춰야 해...
저 기타… 부숴버려야 겠어.’

 

곧 이어 갑자기 소년의 얼굴이 몹시 흉측하게 변했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허리춤에 있던 검은 단검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손이 단검에 닿자 그에게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아니야. 그것으로는 부족해!
다시는 연주하지 못하게 하려면 저 소녀 역시…!’

 

그때 소년의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더니 황급히 오른손을 단검에서 땠다.

 

‘뭐…?’

 

그리고는 왼손으로 푸석한 머리를 뜯겨져 나갈 듯이 움켜쥐었다.

 

‘제기랄… 내가 방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지금은 상황 파악이 우선이다. 그렇게 생각한 소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것은 끔찍한 생각을 한 자신에 대한 분노이자 충동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소년은 끓어오르는 파괴 충동을 꾹 누르고 소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러자 소녀는 그제서야 기타 연주를 멈췄다. 그러자 소년의 요동치던 마음과 험악한 표정 역시 간신히 누그러졌다.

소녀는 처음으로 눈을 떠 소년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푸른 눈은 너무나도 맑고 투명했다. 올리버는 순간 한없이 드넓고 잔잔한 바다 옆의 백사장에 서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동자를 쳐다봤다. 어색한 침묵은 좀처럼 깨질 생각이 없었다.

 

‘뭐야… 왜 아무 말이 없지?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거야?’

 

소년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침묵은 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그저 순진무구한 눈으로 올리버의 두 눈을 응시할 뿐이었다.

 

‘설마… 내가 먼저 말을 걸기를 기다리는 건가?’

 

이는 외로운 도시에서 수 년을 혼자 지낸 소년에게 너무 큰 시련이었다. 그는 말을 붙여보기 위해 보이지 않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저, 저기...”

 

소년은 간신히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뗐다. 그런데 그때 소년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저것… 어디서 많이 봤는데?’

 

소년은 소녀의 검은 코트에 그려진 하얀 엠블럼에 눈이 갔다. 오선지와 음표로 장식된 원형 테두리. 그 안에 장식되어 있는 바이올린은 활 대신 단검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

소년은 그 엠블럼을 알아보고는 주먹을 불끈 쥐며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블레이드 앙상블.’

 

 

올리버의 머릿속에 얼마 전의 과거가 떠올랐다.

 

“쯧, 가망이 없군.”

 

뼈저리게 알고 있었지만 확인사살처럼 가슴 깊이 박혔던 말이 귓가에 다시 맴돌았다.

 

도시가 버려진 뒤 소년이 만난 사람은 이 소녀가 처음이 아니었다. 불과 몇 일 전의 일이었다.

 

이 도시를 찾아왔던 훤칠한 키의 남자. 그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 곳에서 소년을 봤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침착했다. 그의 표정과 몸짓 그 어디에서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남자는 검은색 장발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코트는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또한 그 옆에는 가이드봇(Guide-Bot) 하나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을 조종하고 있는 사람은 남자와 달리 성격이 밝은 지 그의 주위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다.

또한, 그의 왼쪽 팔과 가이드봇의 측면부에는 독특한 엠블럼이 그려져 있었다. 오선지와 음표로 장식된 바이올린과 단검이 그려진 엠블럼이.

 

 

남자는 타오르는 붉은빛을 띄고 있었지만 얼음장 같이 차가운 눈으로 소년을 훑어보더니 말했었다. 가망이 없다고.

잠시 후 가이드봇에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아직 멀쩡하게 들리는데.”

 

여성의 질문에 남자는 여전히 감정 변화가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다시 한번 잘 들어봐. 이 소년은 이미 인간이라고 할 수 없어.”

 

남자의 대답은 소년의 마음에 악의 없는 비수를 찔러 넣었다. 남자는 여성의 음성이 나오는 가이드봇보다도 더욱 감정이 없는 로봇처럼 보였다.

소년은 남자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남자라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어느 방향이라고 할 지라도.

 

“도, 도와주세요…”

 

소년은 십여 년 만에 처음 만난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냉정했다.

 

“시간을 낭비할 만큼 블레이드 앙상블은 한가하지 않아.”

 

찰나의 고민조차 없이 나온 대답에 소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소년의 입술은 꽉 깨물어져 있었고 내면에는 분노, 절망, 창피함, 절박함 등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가자.”

 

남자는 그런 소년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뒤돌아서 떠나려고 했다. 그러자 가이드봇 속의 여성이 당황하여 말했다.

 

“야! 코빈! 그냥 가려고? 야~! 그래도… 으앗!”

툭!

 

그 순간 코빈이라고 불린 남자에게서 뭔가 날아오더니 소년의 앞 바닥에 꽂혔다. 고개 숙인 소년의 시선을 가르고 들어온 그것은 칠흑 같이 검은 날의 단검이었다.

 

“…알아서 처리해라.”

 

코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한 뒤 다시 걸어갔다. 그리고 소년에게 들려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소용없겠지만.”

 

그렇게 코빈이라는 남자는 도시 밖으로 떠났고 그의 가이드봇은 단검에 맞을 뻔했다며 투덜거리며 그를 따라갔다.

 

홀로 남겨진 소년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려 하자 어느새 단검은 소년 그림자의 가슴에 꼽혀 있었다.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기억이 떠오르자 소년의 표정은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이 소녀가 어디서 왔고 무슨 목적이 있는지 몰랐지만 이제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소년에게 중요한 것은 소녀가 그 남자 코빈과 같은 소속이라는 것이었다.

 

‘너 역시 그와 다르지 않겠지.’

 

처음부터 자신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도 자신을 무시했던 소녀. 소년은 그녀 역시 자신을 관심 가질 가치조차 없는 존재로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용서 못해…’

 

그렇게 생각하자 애써 억눌렀던 파괴 충동이 스멀스멀 다시 기어올라왔다. 소년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코빈의 단검으로 소녀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가 준 단검으로 그의 동료를 벌한다면 썩 좋은 결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못해…’

 

그러나 소년에겐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 사실은 올리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자신은 단지 코빈에게 겪은 수모를 죄 없는 소녀에게 풀고자 한다는 것을. 이제 분노는 더욱 거세게 들끓었지만 이제 그것은 소녀가 아닌 자신에게 향했다.

 

분에 못 이겨 눈물이 나오려 하자 소년은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사라져.”

 

소녀에게 처음 말을 걸려고 했을 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너무나 쉽게 말이 나왔다.

 

“…여기서 사라지라고.”

 

하지만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으며 소년은 여전히 소녀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슥 툭툭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자 자신의 말로 인한 결과를 보고 싶지 않아서 눈까지 꾹 감아버렸다.

 

슥 달그락

 

사물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자 이제 소년의 심장이 거침없이 쿵쾅거렸다.

 

‘뭐야. 뭘 하고 있는 거야. 설마 나를…’

저벅 저벅 저벅

 

곧 이어 들려오는 발소리. 대피소 입구를 향하는 그 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발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갔나.”

 

소년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 심한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안도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쫓아냈다는 절망감. 그리고 알 수 없는 아쉬움.

 

소녀가 앉아 있던 곳에는 블레이드 앙상블의 엠블럼이 그려진 작고 검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소녀가 두고 간 모양이었다. 소년은 그것을 열어보려다 허리춤의 검은 단검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와 같은 소속의 남자가 주고 간 단검.

 

“어차피 똑같겠지 뭐…”

 

소년은 상자를 그대로 둔 채 돌아섰다. 그리고는 그대로 자신이 직접 만든 침대로 돌아왔다.

 

털썩

 

소년은 맥없이 쓰러져 누운 뒤 두 눈을 뜬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밤이 찾아오자 소년은 부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급히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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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llust from D.gray-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