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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재/[자작] 블레이드 코드

[블레이드 코드] Act.1-1장 말없는 소녀 - 4화

부스럭 부스럭

“하아… 젠장할”

 

그날 밤, 올리버는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두 번째 달도 뜨지 않은 날이라서 잠들기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나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 뭣 때문에 못 잠드는 건데. 왜…”

 

답답함에 혼잣말을 중얼거렸지만 사실 소년은 질문의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됐어. 아니, 아니야. 헛된 기대를 품어 봤자…’

 

밤은 점점 더 깊어 가는데 소년의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이 더욱 가득차기 시작했다. 의미 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만약 쫓아버리지 않았다면…’

 

소년은 이제는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온갖 상황을 상상했다. 그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 제발 그만 좀…”

 

끝없이 이어진 질문과 상상 때문에 결국 소년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해가 다시 떠오르면서 바깥이 다시 밝아질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중천에 뜨자 소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떴다.

 

“…뭐였지.”

 

꿈을 꿨다. 무언가 기분 나쁜 꿈을. 하지만 아무리 떠올리려 노력해봐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좋지 않은 끝맺음에 놀라 눈을 떴다는 것만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

 

고요했다. 어제와는 다르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실망감이 가득한 소년의 표정에서 그가 일어났을 때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툭 툭 끼이익… 쿵

 

올리버는 힘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대피소 강당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제 소녀가 앉아있었던 자리를 아련하게 쳐다봤다.

 

“!!”

 

소년은 뭔가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서 급히 소녀가 있던 자리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곳에 놓여 있는 것을 바라봤다. 블레이드 앙상블의 엠블럼이 그려진 검은 상자. 그것은 이제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되어 있었다.

 

“틀림없어.”

 

상자가 저절로 두 개가 됐을 리가 없었다.

 

“왔다가 간 거야.”

 

소년은 얼굴이 화색이 되어 급히 대피소 밖으로 달려나갔다.

 

‘어디. 어디 있지.’

 

하지만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급해진 소년은 뛰어나가서 정신없이 흔적을 찾아다녔다.

 

‘제발, 제발…’

 

그러나 소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바람이 곱게 정리해둔 모래에는 소년의 발자국만 무성했다.

 

‘없어…’

 

소년은 낙담하여 터덜터덜 다시 대피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소녀가 앉아 있었던 자리, 두 개의 검은 상자 옆에 앉았다.

 

‘…’

 

소년은 잠시 상자를 쳐다보면서 무언가를 결심했다.

 

슥 달그락

 

소년은 상자를 들어서 자세히 살펴봤다. 자세히 보니 상자는 꽤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 윗 부분에 있는 작은 스크린이 있었다.

 

“…진공냉각중”

삑 치익! 찰칵

 

스크린에 있는 자물쇠 모양을 누르자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상자의 잠금 장치가 해제됐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안에는 노랗고 납작한 사각형으로 생긴 것들과 물통이 두 개 들어있었다.

 

‘물.’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물통을 집어 들어 보물단지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입구를 연 뒤 한 모금 마셔보았다.

 

“!!”

 

소년의 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딱 적당한만큼 시원한 물이 말라붙은 혀와 목을 타고 흘렀다. 그러자 침조차 잘 나오지 않던 입 안에 수년 만의 촉촉한 감촉이 돌아왔다.

 

벌컥 벌컥 벌컥

 

소년은 눈깜짝할 새에 통에 남은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모금은 입 안에 머금은 뒤 잠시 눈을 감고 시원한 느낌을 음미했다.

 

‘아아… 살 것 같아…’

 

죽음이 아닌 삶을 생각한 것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알지 못했다.

이번에는 노랗고 납작한 사각형 모양을 집어 들었다. 소년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아래에 조그맣게 쓰여진 글씨를 발견했다.

 

“보급형 에너지 크래커.”

 

소년은 아직 도시에 먹을 것이 남아있었던 시기에 가게에서 봤던 것을 떠올렸다.

 

‘세상에…’

 

크래커의 위에는 소금이 솜털처럼 붙어 있었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었다.

 

“!!”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강렬한 짠맛이 혀를 강타했다. 소년은 크래커를 씹지 않고 입 안에 머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온 혀의 촉촉함이 그것을 부드럽게 만들 때까지 천천히 짠맛을 음미했다. 그에게는 터무니없는 사치였다.

 

‘응…?’

 

그러다가 갑자기 입에 짠맛의 액체가 흘러 들어왔다.

 

‘눈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행복에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 이게 갑자기 왜…”

 

겨우 물 한 통과 크래커 한 조각에 눈물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겨우 물 한 통에 크래커 한 조각.

 

“흑… 크흑… 흐흑…”

 

갑자기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어 닥치자 소년은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 냈다. 한 손에는 빈 물병을, 한 손에는 남은 크래커 몇 조각을 쥔 채로.

 

 

실컷 울고 후련해지자 소년은 소녀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내려면 그녀를 만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잠든 사이에 놓고 간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목적을 알 수는 없었지만 다시 왔다는 것은 아직 그녀는 소년에게 용건이 남아있다는 의미였다.

 

“좋아.”

슥 털썩

 

소년은 그 자리에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은 뒤 그녀가 하루 전에 걸어 나갔던 방향을 바라봤다. 그의 예상이 맞다면 이곳에 기다리다 보면 분명 그녀를 만날 수 있을 터.

 

슥 툭툭

 

올리버는 식량이 들어있는 남은 식량을 꺼내 먹으려고 상자를 가져와서 먼지를 털었다.

 

“…”

 

하지만 잠시 생각하더니 그대로 옆에다 밀어 두었다. 여전히 배가 고팠지만 남은 것은 더 좋은 일을 위해 아껴 둬야 겠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 지나고 어느 덧 태양이 뉘엿뉘엿 지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

그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기도 하고, 대피소 입구 밖으로 나가서 주변을 살펴보기도 했다. 소녀를 찾으러 나갈까 싶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길이 엇갈려서 만나지 못할까 겁이 났다.

 

어느 덧 해가 완전히 지고 다시 달이 떠올랐다. 그러나 소년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침실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밤을 새는 것 정도는 익숙해.’

 

소년은 바짝 정신을 차리고 다시 소녀가 있던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 달조차 지고 고요한 새벽이 찾아왔다.

 

두근 두근

 

어제 잠들었던 시간이 가까워지자 소년의 심장이 거침없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오후에도 오늘 새벽에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다시 찾아온다면 분명 지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양이 다시 떠오르며 주변을 환하게 비췄다. 어두웠던 대피소 강당에 빛이 스며들며 밝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는 한 사람 밖에 앉아 있지 않았다. 소년 올리버 단 한 사람만.

어느 덧 시간은 소년이 어제 잠들었던 시간을 한참 지났다.

 

“…어디 간 거야…”

 

기대감과 설렘만큼이나 거대한 실망감이 소년을 찾아왔다. 그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으나,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안돼…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올 지도 모를…’

 

결국 소년은 그 자리에 쓰러져서 잠들고 말았다.

 

 

“헉!”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올리버는 화들짝 눈을 떴다. 다행히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난 것 같지 않았다.

 

“휴…”

 

올리버는 안심하고 식량 상자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어…?”

 

소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하나 둘 셋.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소년은 다시 한번 세어봤다. 하나 둘 셋. 식량 상자가 세 개가 되어 있었다. 어제 열어서 먹었던 것 하나. 그리고 멀쩡한 것이 두 개.

 

“…왔다 갔어!”

 

소년은 벌떡 일어나 대피소 강당 주변을 빠르게 둘러봤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소녀를 찾을 수 없었다. 다급해진 그는 대피소 내부 곳곳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어디, 어디야. 어디에 있어?’

 

하지만 역시 소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대피소를 떠난 것이다. 소년은 급히 대피소 밖으로 달려나갔다.

 

‘제발… 제발…’

 

소년은 필사적으로 주변을 살펴봤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사람의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낙심하고 있던 그때였다.

 

“발자국…!”

 

곧장 도시 중심으로 향하는 발자국이 소년의 눈에 들어왔다.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니 분명 최근에 생긴 것이었다.

 

탓탓탓

 

소년은 급히 발자국을 따라 달려갔다.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었다. 소녀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체는 무엇인지, 왜 자신을 깨우지도 않고 그냥 간 것인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헉 헉 헉…”

 

하지만 어느 새 그런 의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그것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헉… 헉… 뭐야, 어째서…”

 

올리버는 당황하여 멈춰 섰다. 건물이 즐비한 상가에 들어서자 발자국이 느닷없이 끊긴 것이다.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

 

부자연스럽게 끊긴 발자국. 마치 소녀가 그 자리에서 증발해버린 것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여기서부터 그녀의 뒤를 쫓아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소년이 망연자실하고 있는 그때였다.

 

크르르…

“응…?”

 

생전 처음 듣는 기묘한 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진 올리버. 그는 천천히 소리가 난 곳으로 돌아봤다.

 

“저, 저게 뭐야…”

 

2층 높이의 상점 옥상 위에서 정체불명의 야수가 올리버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의 4배는 되어 보이는 크기의 네 발 짐승. 녀석은 턱 아래까지 내려오는 거대한 두 개의 앞니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등의 노란빛 털 위에는 바위 표면을 연상케 하는 갑각이 붙어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올리버는 예전에 책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데저트 타이거?! 어, 어째서 여기에…”

 

한번 사냥감을 점 찍으면 사막 끝까지 따라붙는다고 알려진 맹수.

이상했다. 녀석들의 서식지는 사막 외곽에 있는 바위 지대이며 여간해서는 도시 폐허에 흘러 들어오지 않는다. 블로섬 시티에서 태어나 이곳을 벗어난 적 없는 올리버가 한 번도 녀석을 마주친 적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지금 올리버에게 지금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녀석의 날카로운 노란색 눈은 당장이라도 덮치려는 듯 그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크르르…

 

그 짧은 순간에 올리버는 맹수에게 잡아 먹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분명 자신이 원했던 죽음이 아니었다.

 

“아, 안돼. 저리 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올리버가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려 하자. 데저트 타이거의 눈빛이 순간 돌변했다.

 

크아아!

“으, 으아아악!”

 

맹수가 달려들자 올리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데 그때.

 

타타타탓! 지잉. 부웅!

크아아… 툭.

 

무언가 육중한 것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 올리버는 조심스럽게 눈을 떠서 그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허억…”

 

데저트 타이거의 서슬 퍼런 눈빛이 여전히 올리버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몸통에 붙어 있지 않고 머리와 함께 땅에 떨어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올리버는 고개를 돌려 맹수가 달려들었던 방향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그가 발견한 것은 목이 잘린 데저트 타이거의 몸통.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은발의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