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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재/[자작] 블레이드 코드

[블레이드 코드] Act.1-1장 말없는 소녀 - 2화

몇 일 전.

 

F 섹터, 속칭 버려진 구역(Fallen Sector)의 어느 도시. 끔찍한 사막화가 덮쳐서 아무도 살지 않게 된 번화가. 그곳 사거리 중심에 소년 하나가 죽은 듯 누워있었다.

 

“지직… 시민… 지직…”

“으… 시끄러워…”

“대피… 지지직… 서둘러…”

 

태양의 뜨거운 손길과 고장 난 홀로그램의 괴성을 견디지 못하고 소년은 눈을 떴다.

 

말라 비틀어진 몸과 극한의 건조함으로 푸석푸석해진 머릿결. 검은색이지만 모래 때문인지 고생 때문인지 회색에 가깝게 보이는 머리색. 거지꼴이나 다름없이 헤져버린 옷.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외모에 다크 서클이 짙게 드리운 갈색 눈. 이 소년의 이름은 올리버였다.

 

“하아…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의 얼굴은 실망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한껏 일그러졌다.

 

“역시나 실패인가…”

 

역시나 실패. 그것은 그가 무엇인가 거듭 실패해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오른손에는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쥐어져 있었다. 극한까지 연마된 칠흑같이 검은 단검. 소년은 상처 없이 멀쩡한 왼쪽 손목과 단검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긴…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칼날에 비친 소년의 눈동자에는 단검에 대한 깊은 실망감이 비쳤다.

 

“어차피 잘 될 리가 없었는데… 후…”

 

그는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쉬며 한탄했다. 절망해버린 그는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하늘은 우울한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름 한점 없이 깨끗했으며, 태양은 그를 깨웠을 때보다 더욱 강한 손길을 뻗쳤다.

 

“제기랄… 날씨는 또 왜 이리 좋은 거야?”

 

소년 역시 그런 하늘과 태양에게 발악하듯 아랑곳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정오를 지났다. 소년의 반항에 질려버린 태양이 그를 두고 지평선을 향해 떠나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소년은 태양을 가려준 고마운 존재의 정체를 확인하려 고개를 돌렸다.

 

“…너였냐.”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고층 빌딩. 저것 역시 검은 단검처럼 한 때는 소년의 염원을 이뤄줄지도 모를 희망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매일에 종지부를 찍어줄 희망.

 

소년은 저곳 꼭대기에서 중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했었다. 그것이 진정한 마지막 자유이기를 바라며. 하지만 공중에서 기분 좋게 정신을 잃은 뒤 다시 깨어났을 때 알게 된 사실은 변함없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 절대 멀쩡할 수 없는 높이였지만 소년의 몸은 여전히 다친 곳 하나 없이 볼품없는 그대로였다.

 

그는 그렇게 변함없는 매일 새로운 실패만을 계속 쌓아왔다.

 

“그래. 그래서 다음은 뭐야? 이제 뭘 또 시도할래? 응?”

 

 

소년은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자유 죽음조차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하는 처지를 비관하며. 하지만 어째서인지 거기에 속이 타 들어가는 만큼의 분노가 담기지는 않았다.

 

“시민… 지지직… 모래 폭… 지직… 대피…”

 

도시 경보 시스템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 찢어지는 전자음으로 이뤄진 기괴한 소리. 소년은 그 속에서 익숙하게 모래 폭풍이라는 단어를 식별했다.

 

“후… 정말 되는 일이 없군…”

 

소년은 한숨을 내뱉으며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죽지 못할 거면 고통도 느끼지 말든가...”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것이지 고통받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는 대피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올리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도시 폐허를 터덜터덜 걷다가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그가 걷고 있는 길을 쳐다봤다. 그는 수십 명이 동시에 걸어도 거뜬한 넓이의 인도를 혼자 독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는 그것을 원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0차로로 이루어진 거대한 도로. 충분히 넓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차가 뒤엉켜 있어서 난잡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소년은 그것을 보고 불안한 안도감을 느꼈다.

도로 너머로 고층빌딩과 상가 건물들이 이 난장판을 장식하는 병풍처럼 늘어서 있었다. 한 때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분주히 삶을 이어갔던 닭장. 하지만 그곳은 이제 텅 비어 있다. 그 사실에 소년은 역시 불안한 안도감을 느꼈다.

수 년 전에 최악의 사막화가 덮친 도시. 이제 이곳에 살아있는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다. 소년 올리버를 제외하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도시의 비상 전력은 과거의 영광을 잊지 않으려 애처롭게 홀로그램을 유지하고 있었다.

 

터벅 터벅

 

“…”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할 뿐이던 소년은 어느 말라비틀어진 나무 앞에서 돌연 걸음을 멈췄다.

 

“화. 화화. 환영. 환영합니다. 아.안내를. 원원원하면…”

“…알고 있어.”

 

 

소년이 나무 앞에 있는 홀로그램 기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기기가 있는 힘껏 전력을 끌어 모으면서 죽은 것처럼 보였던 나무에 홀로그램으로 된 분홍색 꽃잎이 애처롭게 만발했다.

 

인류가 이 꼴이 되어 박멸되기 전에는 환경이 파괴되어 살아있는 벚꽃을 보기가 어려워졌었다. 이 도시는 그 당시 최후까지 벚꽃 나무를 살린 곳으로 유명했다. 그러다가 끝내 마지막 벚꽃이 시들자 유명세가 가라앉기 전에 그 빈 자리를 홀로그램으로 대체하며 발버둥쳤다고 한다.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하는 안내 음성은 그런 사실을 벌써 수 년에 걸쳐 수십 수백 번째 소년에게 친절히 설명하고 있었다.

 

비록 위조된 아름다움이라고 해도 그것을 천천히 음미하자 소년의 표정은 점점 풀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툭, 지이잉…

 

“뭐야. 왜 이래?”

“지지직… 시민… 러분… 대피…”

“하아… 그래. 가면 될 것 아니야.”

 

소년은 미처 다 감상하지 못한 나무를 그대로 두고 발길을 돌렸다.

 

 

올리버는 곧장 대피소로 향하지 않고 익숙하게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소년은 배가 고프고 목도 말랐지만 먹지 않아도 죽지 않는 것을 확인했으니 먹을 것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 도시에 더는 먹을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배고픔 때문에 잠들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잠들지 못한 밤의 끔찍한 고독. 소년은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이윽고 그가 도착한 장소는 버려진 서점이었다. 굶주림을 참고 잠들기 위해 소년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책을 읽는 것이었다. 끔찍하게 재미없고 흥미가 안 생기는 책을.

 

부스럭 부스럭

 

소년은 최대한 수면제로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먼저 집어 든 것은.

 

“외우주의 존재와 종말론”

 

비교적 최근 것이었다. 하지만 소년에게 종말론은 필요 없었다.

 

“이미 현실이 종말인데 무슨…”

 

소년은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인류 연합(United Humanity)의 출범 과정.”

 

멸망의 날 이후 와해된 단일 세계 정부의 수립 과정. 소년은 인간들이 탐욕 때문에 서로 싸우는 과정은 썩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미있어서는 오히려 곤란했다.

 

“이것도 기각.”

 

휙, 투툭

 

소년은 두 책을 모두 던져 버리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서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종의 감소와 식량난.”

 

역시 의미 없는 내용이었다. 이미 세계는 외우주에서 온 존재 덕분에 인간이라는 암을 제거했고 세계는 살아나고 있었다.

 

“이건…?”

 

바로 옆의 책이 눈에 들어온 소년은 책을 집어 들어 모래를 털어냈다.

 

툭 툭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자기개발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일구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쓴 책이었다. 그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

 

소년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책을 가만히 쳐다봤다.

 

저벅 저벅

 

소년은 서점을 빠져나왔고 그의 왼손에는 책이 한 권 쥐어져 있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는 어느새 잠들기 좋은 책을 찾는다는 목적을 잊어버렸다.

 

휘이잉 덜컹 덜컹 휘이이잉

 

책을 찾는 사이에 모래바람이 강해져서 시야는 흐려지고 온갖 사물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모래폭풍이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소년은 서둘러 대피소로 걸음을 재촉했다.

 

번화가를 벗어나는 소년의 머리 위로 간판 하나가 보였다.

 

영원한 아름다움이 피어나는 곳

블로섬 시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 때는 이 도시에도 뭔가 피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는 피어나는 것이 없다.

소년의 끝없는 절망을 제외하면.

 

 

번화가를 벗어나 주택가로 나아가자 드디어 대피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 체육관을 개조하여 만든 곳. 큰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학교 체육관은 여기가 전부였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 의하면 태어나는 사람이 워낙 줄어서 더 세울 필요도 없었다고 했다.

이곳은 사실 대피소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건물의 절반은 무너져 내려서 일부 공간을 제외하면 외부의 위협을 막아주지 못했다. 식수대는 물 대신 모래를 내놓기 시작한 지 오래다. 식량고는 올리버가 처음 열고 들어갔을 때부터 먹을 것 대신 싸움의 흔적만 즐비했다.

 

휘이잉… 덜컹 덜커덩…

 

모래폭풍은 이제 더욱 세차게 불며 대피소 내부의 버려진 생필품을 굴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모래바람이 침범하지 못하는 체육관 가장 안쪽의 비품 창고까지 들어갔다.

 

끼이익… 끼이익… 쿵

 

끔찍한 비명소리를 지르는 쇠문을 여닫자 아슬아슬한 전력이 은은하게 빛을 비추고 있는 좁은 공간이 나타났다.

 

툭 툭 툭 털썩

 

올리버는 몸에 들러붙은 모래를 거칠게 털어낸 뒤 거칠게 자신의 침대에 주저 앉았다.

사람들이 버리고 간 옷가지나 이불 따위로 만든 침대. 그곳이 바로 소년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도시 전체가 버려져 있었기 때문에 모든 곳이 마음만 먹으면 그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으로 직접 만든 이 볼품없는 곳만이 그에게 안식을 주었다.

 

“좋아. 어디 한 번 봐볼까.”

 

쌓인 옷가지를 소파삼아 기대어 눕는 올리버. 그 옆에는 도대체 몇 권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책이 쌓여 있었다.

소년은 방금 가져온 책을 펼쳤다. 그리고 거기에 쓰인 문구를 하나 하나 신중하게 읽었다. 단언컨데 단 한 번도 그렇게 집중한 적은 없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이왕 실패할 거라면 크게 실패해라.

비 온 뒤에 땅은 더욱 굳기 마련이다.

 

“…”

 

 

몇 장 보지 않았는데도 소년은 책을 덮어버리고 소파에 완전히 기대어 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헛소리하고 있네...”

 

그렇다. 이것은 모두 궤변이다. 모든 것이 실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자기 자랑일 뿐이다. 모두가 이들과 같지는 않다.

모두가 실패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거듭된 실패로 더 많은 두려움과 고통이 쌓이는 사람도 있다. 실패만 하고 끝내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크게 실패하여 재기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비 온 뒤의 약해진 땅이 무너져 결국 산사태가 되기도 한다.

 

이들의 이야기만이 책으로 남은 이유. 그것은 살아남은 것이 이들뿐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지 못한 사람은 남길 게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닐 것이다.

 

휙 툭

 

“하아아…”

 

소년은 책을 옆으로 던져 버린 뒤 그대로 눈을 감고 옆으로 누웠다.

 

휘이잉! 덜컹 덜컹! 휘이이잉!

 

이제 바깥에서 펼쳐지는 모래폭풍의 연주는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영향으로 어느 덧 대피소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 앉았다.

 

오늘은 외우주 존재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던 두 번째 달이 함께 뜨는 밤이었다. 그러니 달빛에 방해받지 않고 빠르게 잠드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소년은 모래폭풍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휘이잉! 덜컹! 덜컹! 덜컹! 휘이이잉!

 

그리고 생각했다.

 

‘이대로 잠들고 나면 다시는 깨어나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날 밤. 소년은 꿈을 꿨다.

 

소년은 번화가에서 봤던 홀로그램 벚꽃 나무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닿는 모든 것을 모래로 바꿔버리는 모래폭풍이 그와 나무를 휘몰아치며 에워싸고 있었다.

 

이윽고 모래폭풍이 더욱 거칠어져서 홀로그램이 꺼지려 하자 소년은 온몸으로 나무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얼마 가지 않아 나무는 더는 꽃을 피우지 못하게 됐다.

모래폭풍은 소년의 노력을 비웃는 듯 잠잠해지고 주변은 칠흑 같이 어두워졌다. 끔찍한 고독. 소년은 바닥 밑에는 새로운 바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딩…

 

생전 처음 듣는 낯선 소리가 그의 고막을 타고 들어와 심장을 파고 들었다.

 

딩…

 

다시 한번 소리가 들리자 칠흑 같은 하늘이 무너지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소년은 그 속에서 순백의 손길을 느끼고는 그것을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리고 마침내 손이 닿으려는 그때.

 

“허억…!”

 

올리버는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모래폭풍은 잦아들고 어느새 강렬한 햇빛이 그의 얼굴을 강타하고 있었다.

 

“…뭐. 그렇겠지”

 

물론 잠들기 전의 기대도 헛된 것이었으며 이렇게 또 다시 의미 없는 오늘이 찾아오고 말았다.

몸을 일으킨 소년은 기이했던 어젯밤 꿈을 떠올렸다. 생전 처음 듣는 소리.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가슴 시리게 마음을 파고 들었었다.

 

‘어차피 꿈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하고는 소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딩…

 

순간 소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럴리가…”

 

소년은 기지개도 켜지 않고 무엇인가에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먹은 것도 없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여 온몸의 체중을 실어 문을 밀어냈다.

 

끼이익... 쿵!

 

딩…

 

쇠문이 열리자 이제 소리는 더욱 명확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소년은 어머니를 찾아다니는 아이처럼 정신없이 강당으로 나아갔다.

 

딩…

 

소리가 가까워지자 마음을 파고드는 느낌은 이제 시린 것을 넘어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체육관 강당으로 나온 올리버는 생필품만이 굴러다녀야 할 그곳에서 낯선 것을 목격했다.

 

“…저건… 소녀…?”

 

-

 

※ Ilust from Nier Automa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