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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재/[자작] 블레이드 코드

[블레이드 코드] Act.1-2장 피타고라스 - 7화

피타고라스는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하아…”

 

정적. 주변에는 그의 무거운 호흡 소리만 들렸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눈을 떴다.

 

“좋아.”

 

띡, 즈응…

 

돌연 그는 가이드봇 조작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적당한 바위 하나를 발견하여 그곳으로 다가갔다.

 

탁탁 털썩

 

“후우…”

 

그는 바위 표면을 가볍게 털고 그 위에 앉아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자세를 바르게 고친 뒤 팔짱을 낀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이것은 생각을 정리해야 할 때면 으레 하는 그의 독특한 습관이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자.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피타고라스는 이 난관을 열고 나갈 열쇠를 찾기 위해서 천천히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며칠 전, 블로섬 시티 인근의 이름조차 잊혀진 한 위성 도시.

 

이 날도 어김없이 피타고라스는 인상을 쓴 채 가이드봇의 눈을 빌려 한 소녀를 보고 있었다. 기타 모양의 거대한 빔 액스를 옆에 세워 둔 채 기도하고 있는 소녀를.

그녀의 주변에는 검은 모래알 같은 것이 휘날리고 있었다. 바람 한점 없는데도 살랑살랑 휘날리며 하늘 너머로 흩어져 사라지는 그것은, 이 일대를 장악한 노란 모래알과 어울리지 않았다.

 

검은 모래알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피타고라스가 입을 열었다.

 

“상황종료.”

“별것 아니었네. 역시 노엘이야. 응!”

 

스피커 너머로 들려온 젊은 여성의 목소리는 예상했다는 듯 기도하고 있는 소녀, 노엘을 칭찬했다.

 

“리아나. 부탁이니 임무에 좀 진지하게 임해줄 수는 없겠습니까?”

“또 또 그런다. 아저씨는 긴장을 풀 필요가 있다니까?”

“하아… 임무에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으이그… 아저씨 이마 좀 찌푸리지 마. 그러다가 더 빨리 늙는다?
어찌나 찌푸렸는지 여~기 멀리서도 다 보인다구.”

“스나이퍼 라이플로 남을 관찰하는 그 악취미도 그만 두면 좋겠군요.”

“풉, 미안.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만!”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됐습니다. 베이스 캠프로 돌아갈 준비나 하시죠.”

“응! 그런데 노엘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데, 혹시 또 기도하고 있어?”

“예. 그렇네요.”

“그럼 주변 안전 확인하고 오는 동안 노엘은 아저씨에게 맡길게!”

“그러시죠.”

 

즈응

 

리아나와의 통신이 종료됐지만 피타고라스는 여전히 가이드봇으로 노엘을 보고 있었다.

 

“흠…”

 

그런 그의 미간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노엘. 그녀는 지금 방금 전까지 전장이었던 장소에 홀로 서있다.

 

‘보통은 불가능한 일이야.’

 

피타고라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모션 플레이어. 감정을 연주한다고 알려진 그들은, 축복일지 저주일지 모를 힘으로 인해 일반인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이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소 둘 이상의 가디언의 보호가 필요했다. 이것은 블레이드 앙상블을 비롯한 앙상블들이 무수히 많은 피를 흘리며 얻어낸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였다.

 

‘그랬을 터인데…’

 

저 소녀는 단 한 명의 가디언도 없이 혼자 힘으로 전장에 서있다.

 

‘이모션 플레이어 노엘이라…’

 

피타고라스는 소녀를 뚫어져라 노려본 채로 처음 그녀의 크루에 배정받았던 당시를 떠올렸다.

 

 

“대체 뭡니까? 이 정신나간 크루는.”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손 위에 쥐어진 신규 크루 데이터를 보자마자 대뜸 욕지거리부터 튀어나왔다.

 

환상 즉흥곡 크루(Fantaisie – Impromptu Crew). 거기에 써져 있지 않나.”

 

그의 앞에 앉아있는 연배 있어 보이는 남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제 말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명단 말입니다. 명단!”

“명단이 왜?

“이것을 보십쇼!””

 

[블레이드 앙상블 : 소속 크루 정보]
크루 이름 : 환상 즉흥곡
이모션 플레이어 : 노엘
가디언 1 : 없음
가디언 2 : 없음
스나이퍼 : 리아나
오퍼레이터 : 피타고라스

 

“대체 누구입니까? 이런 기본도 안 된 엉터리 크루를 편성한 사람 말입니다!”

 

피타고라스의 말이 끝나자 그의 앞에 있던 남자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설마… 당신입니까? 마테오.”

 

피타고라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마테오라고 불린 남자를 바라봤다.

 

칙 칙 스읍 후…

 

마테오는 태연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한 모금 들이킨 뒤 내쉬며 말했다.

 

“가디언 녀석들,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더군.”

 

그는 담담히 말했다. 마치 결과를 예상했다는 것처럼.

 

“설득 당했던 녀석들도 노엘을 만나보더니 다들 지레 겁먹고 도망가더라니까.”

“당연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소녀이지 않습니까?”

 

소녀 노엘. 그녀는 많은 것이 베일에 감춰진 존재였다. 그녀의 출신지, 능력의 출처, 가족 관계, 과거 이력 등 모든 정보가 1급 기밀로 취급됐으며, 그 말은 곧 블레이드 앙상블 수뇌부를 제외하면 아무도 그녀에 대해 자세히 몰랐다. 이 크루를 편성한 마테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불확정 요소에 목숨을 걸 바보가 있을 리 없습니다.”

“왜, 거기 써져 있지 않나.”

“리아나 말입니까? 그녀의 성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녀는 열외입니다.”

 

 

“그리고 여기도.”

 

 

마테오가 피타고라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하겠다고 한 적 없습니다.”

“피타고라스.”

“안 합니다.”

“일단 한번 들어보게.”

“…뭡니까.”

“내가 이 소녀를 교육한 것은 알고 있지?”

“블레이드 앙상블에 당신 손을 거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까?”

“녀석, 말에 가시가 있군.”

“계속 말씀하시죠.”

“내가 노엘을 가르치면서 느낀 게 뭐였을 것 같은가?”

“보호본능? 안쓰러움? 뭐 그런 거 아닙니까? 소녀이지 않습니까.”

“아니네, 아니야.”

 

칙칙 쓰읍 후우…

 

“경외감.”

“…예?”

“그 아이, 노엘은 말이네…”

 

 

띠리릭 띠리릭

 

“…뭐지?”

 

알림음이 울리자 피타고라스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근거리 통신. 아마도 이 근방에 있는 다른 블레이드 앙상블 일원이 보낸 모양이었다. 멸망의 날 이후에 인공위성이고 전파탑이고 멀쩡한 게 없었기 때문에 모든 통신이 중요했다. 생존자의 메아리가 울려 퍼진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피타고라스는 서둘러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인.
마탄의 사수 크루
코빈 울프.

 

“윽, 하필이면.”

 

마탄의 사수 크루. 그들은 블레이드 앙상블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아서 이례적으로 단독행동까지 허가 받은 이들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인지 그만큼 제멋대로인 이들이었다. 특히나 이 코빈 울프라는 남자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중에서도 가장 협력성이 떨어지는 자였다.

 

하지만 그의 실적은 누구든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피타고라스는 마지 못해서 메시지를 유심히 살펴봤다.

 

F 섹터의 블로섬 시티에서 이모션 페스트에 감염된 소년 발견.
디스페어 계통으로 추정.
소리에 불협화음이 심해서 가망은 없어 보임.
누구든 통신을 받는다면 가서 처리할 것.

 

“예상대로군요.”

 

규정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적은 딱딱한 말투, 중요하지 않은 일은 남에게 떠넘기는 일처리 방식을 보고 피타고라스는 코빈답다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는 메시지 내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F섹터 블로섬 시티.”

 

피타고라스는 그 단어를 보고  과거에 목격했던 벚꽃이 만개한 도시를 떠올렸다. 하지만 F 섹터라는 단어가 더는 그곳이 그의 기억처럼 아름답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렸다.

 

“이모션 페스트에 감염된 소년. 디스페어 추정.”

 

이모션 페스트(Emotion Plague). 외우주에서 유입된 이 정체모를 질병이 안타깝게도 소년 하나를 또 잠식한 듯했다. 인간의 감정에 기생한다고 알려진 이 병은 숙주를 죽지 않게 만들면서 감정을 점점 격하게 만든 뒤 종국에는 이모션 비스트화 시킨다. 이 질병은 감정에 따라 그 위험도가 다르며 디스페어(Dispair, 절망) 계통이면 가장 흔하고 위험도가 낮은 유형이다. 하지만…

 

“불협화음이 심해서 가망 없음.”

 

이모션 페스트를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이모션 플레이어. 그들은 감정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 감염도를 가늠한다고 했다. 이모션 플레이어가 아닌 피타고라스는 들을 수 없지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감염도가 심할수록 불협화음이 심해진다고 했다.

모든 정보를 검토한 피타고라스는 분석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 정도면 굳이 갈 필요는 없겠군요.”

 

가망 없음. 위험도가 낮은 디스페어 계통. 아무도 살지 않은 버려진 도시. 이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피타고라스는 당분간은 피해가 더 커지지 않을 것이니 다른 이들에게 맡기면 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의 생각에 노엘은 이런 사소한 것보다 더욱 중요한 일들을 많이 해야 했다.

 

그랬어야만 하는데. 지금 가이드봇이 비추는 화면 속의 그녀는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말을 꺼냈다.

 

“노엘.”

“블로섬 시티로 갈 거예요.”

“안됩니다.”

“가야 해요.”

“아니요. 이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시죠.”

“…아직 이모션 비스트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가서 구해줘야 해요.”

 

피타고라스는 노엘의 말을 단 하나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소년 하나, 그것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 하나를 구하기 위해 가겠다고 했다.

 

‘비효율, 비상식, 비이성적이야.’

 

피타고라스는 답답한 마음을 꾹 누르고 다시 한번 말했다.

 

“불협화음이 심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희망이 없다는 것은 아니잖아요.”

“구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게다가 우리는 방금 임무를 마친 탓에 보급품도 장비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다른 크루에게 맡기는 게 좋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면… 그들이 소년을 도와줄까요?”

“이런 상황이라면 이모션 비스트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토벌하겠죠.
그것이 블레이드 앙상블의 매뉴얼이며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한 수단이니까요.”

“…역시 가야 겠어요.”

“제 말이 이해하기 힘들었습니까?”

“도와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게 아니라 지금…”

 

말을 마친 노엘은 통신을 마치고 그대로 뛰어가 버렸다.

 

“잠깐, 노엘! 노엘!”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녀는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당황하여 가이드봇 화면 너머로 사라지는 노엘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빌어먹을 꼬마 같으니!”

 

피타고라스는 평정심을 잃었다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바로 쫓아야 하나? 아직 리아나가 돌아오지 않았어. 그럼 그녀가 합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니. 그녀라면 노엘이 이동하는 것을 확인하고 따라붙겠지. 바로 이동해야 돼!’

 

결론을 내린 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노엘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일반인의 속도로는 이모션 플레이어를 따라잡는데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녀를 다시 발견한 것은 몇 일이 지나고 나서 블로섬 시티에 도착한 뒤였다.

 

 

그리고 다시 현재. 가까스로 그녀를 발견한 그는 방금 그녀와 거친 언쟁을 마친 참이었다.

피타고라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는 체념한 듯이 말했다. 이 남자는 깨달은 것이다. 노엘을 설득해서 데리고 간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것을.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 뿐이었다.

 

“자, 그럼 어떻게 할까요.”

 

그는 가이드봇 화면 너머의 무너진 담장을 유심히 쳐다봤다.

아까 올리버가 무너뜨렸던 담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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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age from Chainsaw 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