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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재/[자작] 블레이드 코드

[블레이드 코드] Act.1-2장 피타고라스 - 8화

 

F 섹터 블로섬 시티 외곽에 위치한 블로섬 레지던스의 한 버려진 주택.

 

저벅 저벅 저벅

 

그곳으로 키가 훤칠한 남자 하나가 두건으로 얼굴을 둘둘 감은 채 들어왔다.

 

스르륵 탁탁 탁탁

 

남자가 두건을 풀고 얼굴과 안경에 붙은 모래를 털어냈다. 두건 때문에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네모난 안경을 바르게 고쳐 쓰는 남자. 피타고라스는 마침내 가이드봇을 통해 노엘과 대화를 나눴던 장소에 도착했다.

 

“후우…”

 

그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미간에 드리워진 깊은 골짜기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다행히 무사히 도착하기는 했지만 그의 여정이 쉬웠을 리 없었다. 멸망의 날 이후, 세상은 이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이모션 플레이어가 아니라면 홀로 여행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곳이었다. 더군다나 피타고라스와 같은 오퍼레이터에게는 더욱. 하지만 그는 그런 이유로 포기할 자가 아니었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다 보니 그는 반나절이면 올 거리를 꼬박 하루의 여정 끝에 도착했다.

 

피타고라스는 처참하게 파괴된 담장 앞으로 다가갔다. 그것은 바로 노엘과의 대화 중 나타났던 소년이 파괴한 바로 그 담장이었다. 그는 그것을 유심히 살펴봤다

 

“이건… 이상한데.”

 

담장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 속에 확실치 않은 의문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때.

 

“왜? 뭐가 이상한데?”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 하지만 피타고라스는 예상했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왔습니까? 슬슬 올 때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흥!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가왔는데 재미없게 무슨 반응이 그래?”

“같은 앙상블 일원의 위치는 오퍼레이터의 레이더에 다 포착됩니다. 몰랐습니까?”

 

피타고라스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말했다.

 

“리아나.”

“아참! 그랬지. 헤헤.”

 

리아나는 애교 담긴 표정으로 살짝 웃어 보였다.

 

사막의 잔혹한 건조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럽게 나풀거리는 빨간 긴 생머리. 길이가 짧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머리카락이 엉덩이까지 밖에 내려오지 않을 정도로 큰 키. 원피스를 개조한 듯한 수트에 드러나는 굴곡 있는 몸매.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얼굴에 장난끼와 여유가 가득한 표정까지.

어느 것 하나도 피타고라스와 어울리지 않는 이 여성이 바로 블레이드 코드 앙상블 소속의 환상 즉흥곡 크루 스나이퍼 리아나였다.

 

 

“여기가 블로섬 시티? 거기 맞지?”

“예.”

“흐응~”

“…….”

 

리아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피타고라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피타고라스는 애써 그 시선을 외면했다.

 

“좋아! 지금부터 이 리아나가 정답을 맞춰~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 아! 쉿! 스포일러 하는 남자는 인기 없다고 아저씨.”

 

집게 손가락을 세워 입에 가져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리아나.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임무에 진지하게 임해라는 말이 턱 밑까지 올라온 피타고라스였지만, 어차피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입을 닫아버렸다.

 

“흠 흠, 어디 어디~.

코빈이 이모션 페스트에 잠식된 소년을 발견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노엘이 합류 지점으로 오지 않고 여기로 향했단 말이야?
그런데 노엘은 없고 안경 아저씨 혼자 남아서 슬픔에 잠겨 있다라~!”

 

“누가 슬픔에 잠겨 있다는 겁니까?”

“정답! 아저씨… 또 노엘에게 훈계했구나? 맞지?”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군요. 훈계가 아니라 합리적 조언입니다.”

“그게 훈계지 뭐야.
보나마나 노엘! 이것은 이래서 이래야 합니다, 저것은 저래서 저래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강요하듯이 말했을 거 잖아!”

 

리아나는 재미있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안경을 만지는 시늉을 하며 피타고라스의 흉내를 냈다. 그러자 피타고라스는 쳐다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런 걸 합리적인 조언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휴~ 아주 꽉 막혀 있다니까.
아저씨, 그거 알아? 옛날 어느 나라에 훈계하는 꽉 막힌 어른한테 꼰대라는 말을 썼대!
어때? 완전 아저씨 같지!”

“잡담은 이만하면 됐습니다. 그래서, 노엘과 소년은 어느 방향으로 갔습니까?”

“응? 그걸 지금 나에게 묻는 거야? 방금 막 왔는데?”

“어차피 어디인가에서 스나이퍼 라이플로 다 보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어, 어?”

 

리아나는 당황한 듯이 눈이 크게 동그래져서 피타고라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전전긍긍하고 있다가
제가 도착하니 기쁜 마음에 뛰어왔다… 이런 상황 아닙니까?”

“헤헤… 역시 아저씨는 속일 수가 없다니까.”

 

리아나는 멋쩍은 듯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괜히 정돈하기 시작했다.

 

“아까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오퍼레이터의 레이더에 잡힌다고.”

“그런데도 모르는 척 내 이야기를 다 들어준 거야? 와~ 감동이야, 아저씨!”

“그럼 앞으로 임무에 더 진지하게 임했으면 좋겠군요.”

 

피타고라스는 그녀가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을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게 말이지! 노엘이랑 소년이 여기로 들어올 때는 눈으로 쫓을 수 있었는데,
밖으로 나온 뒤부터 둘 다 어찌나 빠르던지 순식간에 놓쳐버렸지 뭐야?”

“…그렇습니까.”

 

피타고라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여기로 들어올 때까지는 쫓았다고 했죠.
혹시 그전에 그 둘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봤습니까?”

“노엘은 느닷없이 나타나서 못 봤지만 소년은 어느 건물에서 나오는지 확실히 봤어.”

“거기가 어디죠? 아, 됐습니다. 여기 지도에 표시해주시죠.”

 

피타고라스가 손목에 있는 장치를 조작하자 블로섬 시티의 홀로그램 지도가 나타났다.

 

“음, 그러니까… 여기야!”

 

리아나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어느 건물 하나를 가르켰다.

 

“우선 여기를 조사해봐야 겠군요.”

“가는 거야? 좋아! 그럼 출…”

“잠깐, 리아나.”

 

신나서 출발하려는 리아나를 멈춰 세우는 피타고라스. 그의 표정은 이전과 달리 사뭇 진지해보였다.

 

“응?”

“조사는 제가 맡을 테니 당신은 다른 일을 맡아 주셔야 겠습니다.”

“에~ 간신히 만났는데 벌써 헤어지자는 거야?”

“네, 바로 그 말입니다.”

“어휴, 틀림없어. 분명 그 피부 속은 기계로 가득 차 있을 거야. 무슨 일을 하면 되는데?”

“노엘과 그 소년…”

 

피타고라스는 소년이 사라졌던 마지막 모습과 노엘이 외쳤던 말을 떠올렸다.

 

‘올리버! 잠깐 기다려!’

“…올리버.”

“올리버?”

“예. 코빈의 메시지에서 언급됐던 소년의 이름입니다. 노엘이 그렇게 부르더군요.”

“우와… 우리 노엘 적극적이네. 벌써 이름까지 알아냈단 말이지~?”

“쓸 데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그 둘의 동향을 지켜보면서 저에게 계속 보고해줬으면 좋겠군요.”

“올리버는 알겠는데 노엘은 왜? 레이더에 다 잡힌다며?”

“레이더로는 위치 말고 다른 정보는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그냥 통신하면 되지 않아? 노엘은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삐칠 성격도 아닌 걸.”

“노엘과 또 의견이 충돌하면 일을 그르칠까 봐 그런 것입니다.”

“흐응~ 아저씨는 아무리 봐도 그런 실수를 할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하아… 굳이 제 입으로 말해야 되겠습니까?”

“응!”

 

리아나는 피타고라스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대하며 천진하게 웃어 보였다. 피곤하지만 이 여자를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면 맞춰줘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피타고라스는 스스로 덥석 미끼를 물었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다툼이 있고 난 뒤에는 각자의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자, 됐나요?”

“뭐, 좋아! 이 리아나가 특별히 인정해주지!”

“하아… 그것 참 고맙군요.”

“노엘이랑 올리버의 행동을 빠짐없이 보고해주면 되는 것이지?”

“예.”

“헤헤. 오랜만에 노엘과 단 둘만의…”

“리아나?”

“으, 응? 왜?”

“당연하지만 리아나도 노엘에게 접근하면 안 됩니다.”

“에~ 왜? 난 아저씨와 다르게 노엘이랑 사이 좋은 걸!”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노엘과 그 소년 올리버. 서로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그렇겠지? 노엘은 이모션 플레이어라서 우리보다 몇 일은 빨리 왔을 테니까.”

“그러니 아마 노엘과 소년 어느 쪽이든 먼저 서로에게 접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 로맨틱해!”

 

즐거운 듯한 표정을 짓는 리아나. 도통 대화 주제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한 그녀를 보고 피타고라스는 피곤한 표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다.

 

“그런데 거기에 당신이 갑자기 나타난다면 소년의 경계가 다시 심해질지도 모릅니다.”

“난 올리버와도 잘 지낼 자신이 있는데.”

“아마도 그 소년이 최근에 만난 사람은 코빈, 노엘 그리고 저 이렇게 셋일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죠?”

“아, 음… 그렇네…”

 

리아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납득했다. 그 셋을 연달아 만난다면 아무리 긍정 에너지를 발산하는 자기자신이라고 해도 블레이드 앙상블을 경계할 것이라고 그렇게 납득했다.

 

“힝… 그럼 노엘이랑 통신은…”

“안됩니다. 노엘이 우리와 통신이 하는 것조차 경계할지도 모릅니다.”

“에휴~ 그렇지? 그렇겠지? 알았어~ 난 또 혼자 외롭게 멀리서 짝사랑이나 하지 뭐~”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응!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빌딩에 올라가서 다시 연락할 게.”

“예. 아마 더는 위협 요소가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시고요.”

“응!”

“그럼…”

“음… 아저씨!”

 

안심하고 헤어지려는 찰나 이번에는 별안간 리아나가 피타고라스를 불러 세웠다. 그러자 피타고라스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아직 할 말이 남아있습니까?”

“나는 머리가 좋지 못해서 작전 같은 것은 잘 모르지만…”

“예.”

“그 소년 말이야. 올리버. 디스페어 계통의 이모션 페스트라며? 제~일 평범하고 흔한 거.”

“맞습니다.”

“그럼 이렇게까지 조심스럽게 할 필요가 있는 거야?
결과가 어떻게 끝나든 그냥 노엘을 도와서 빨리 마무리하면 되는 것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하는 이유가 뭐야?”

“그렇네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싶다고 할까요.”

“어떤 가능성?”

“그건 천천히 말해드리죠.”

“그리고 우리 지금 노엘이 원하는 대로 돕고 있는 것 맞지?”

“…예. 물론입니다. 그게 블레이드 앙상블의 방침 아닙니까.”

“흐응~ 알았어. 그럼 나중에 봐!”

“예.”

 

리아나의 빨갛고 긴 생머리가 가장 늦게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그녀는 떠났다. 리아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피타고라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요. 모든 가능성… 노엘도 이제는 배워야 합니다.
세상은 원하는 대로만 할 수 없고 가끔은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죠.’

 

피타고라스는 리아나가 말한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그는 주택을 나서기 직전에 잠시 멈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올리버가 파괴한 처참한 담장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 미간을 약간 찌푸리더니 이내 다시 뒤돌아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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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age from Illustratior ne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