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서재/[자작] 블레이드 코드

[블레이드 코드] Act.1-1장 말없는 소녀 - 1화

꿈러기 2023. 7. 30. 15:40

 

‘…리버’

‘…누구야?’

‘일…나…올리버…’

‘누가 날 부르는 거야?
아니, 됐어. 일어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대로…’

‘리버… 올…버… 올리버!’

“크윽!”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소년은 눈물이 터져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그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여기가 어딘지 혹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자 문득 그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무엇이든 좋으니 살아 움직이는 것을 찾고자 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눈을 굴렸으나 시야는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기만 했다.

 

‘목소리… 그 목소리는 어디에…’

 

자신을 불렀던 목소리. 그것의 음색이 익숙함 그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은, 필사적으로 그것의 행방을 찾으려 했다.

 

“아악!”

 

그 순간 소년은 갑자기 무언가 머리 속을 헤집는 듯한 격렬한 두통이 느꼈다. 소년은 아픔을 참지 못하고 급히 손을 이마에 가져갔다.

 

‘어…?’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서 느껴진 감촉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의 살갗이 아닌 액체로 된 무언가 같았다. 머리는 분명 자신의 손으로 이마를 만졌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마의 감각은 그것이 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뭔가 착각했겠지.’

 

이렇게 생각한 소년은 이번에는 다리를 움직여 봤다. 그러나 분명 몸에 붙어있는 느낌도 있고 묶여 있지도 않은데 꼼짝 하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깨달은 것은, 정체불명의 액체가 알고 보니 전신을 휘감고 있다는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뭐, 뭐야. 왜 이래. 이게 대체 무슨…’

 

갑자기 끔찍한 공포심에 사로잡힌 소년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이 살기 위해서인지 단순한 공포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분노와 유사한 불쾌한 감정이 요동쳤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구토처럼 목을 타고 역류하여 입으로 올라와 소년의 입을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후… 이런 이런 올리버. 정신이 들어버렸나?”

‘뭐? 누구야… 누가 말하는 거야?’

 

소년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자 공황에 빠져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이건, 이건 내가 아니야 내가 말한 게…’

 

그러나 그의 입술 역시 몸처럼 의지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당황하여 내뱉으려 했던 수십가지 단어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의 머리속에서만 맴돌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소년은 단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는 아까 나를 불렀던 목소리가 아니야.’

 

“오… 당황할 거 없느니라.
기억을 떠올려 보라. 그럼 금방 이해될 것이니.”

‘떠올려? 무엇을? 너는 누구야? 나를 놓아줘!
난…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다고 했느냐? 하하! 그게 정말 네 진심인가?
떠올려 보거라, 널 잔인하게 몰아세운 지난 날들을 말이야!
무엇 하나 원하는 대로 못하는 널 더욱 절망으로 몰고 갔던 날들을!
자, 내가 도와주마!”

 

정체불명의 존재가 소년의 입을 빌려 말을 마치자 소년의 마음에서 별안간 공포심이 사라졌다. 그러더니 그는 비정상적인 침착 상태에 빠져 들었다. 아무래도 이 존재는 소년의 감정마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크아악…’

 

이윽고 시작된 일은 떠올리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고통스럽고 끔찍한 것이었다.

 

소년은 누군가 자신의 뇌에 직접 손을 집어넣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는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내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 이어졌다. 이후 소년은 그가 떠올리기를 원하지 않았던 과거를 주마등처럼 마주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따뜻하질 않았던 생전 처음 만났던 눈동자들. 연민인지 불쾌감인지 알 수 없었던 수백 수천 개의 시선. 마침내 도래한 징벌적 재해. 편했지만 외로웠던 무수한 고독의 시간. 달갑지는 않지만 반갑다고도 느꼈던 싸늘한 시선. 그것이 던지고 간 서슬 퍼런 동정. 그리고…

 

‘뭐였지...? 크윽!’

 

그 다음을 떠올리려 하자 다시 한번 불쾌한 감각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뇌 속을 헤집던 손이 갑작스레 기억들을 감춰버린 듯했다.

원치 않았던 회상이 끝나자 정체불명의 존재는 진지한 목소리로 소년에게 질문했다.

 

“아직도…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소년은 떠올려진 기억을 되새기며 차분히 대답했다.

 

‘아, 그랬었지. 맞아.
사실 나는 죽고 싶었지.
살아야 할 의미가 같은 것은 전혀 없었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소년은 다시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심해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됐어, 이제 편해질 수 있어. 더는 고통받지 않아도 돼.’

 

소년의 마음에 천천히 잔인한 평화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올리버! 넘어가면 안 돼!”

 

그때 목소리가 심해를 가르고 들어와 그의 마음에 박혔다. 틀림없이 아까 소년을 깨웠던 그 목소리였다.

 

‘누구야? 넌 대체 누구인데… 날 자꾸 부르는 거야?’

“올…버… 리버…”

‘날 그냥 내버려 둬… 나는 이제…’

 

“올리버!!”

“헉!”

 

소년은 알 수 없는 감정에 다시 한번 힘껏 눈을 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와는 달리 그의 목소리가 목청껏 터져 나왔다. 또한 흐릿해서 보이지 않았던 시야가 또렷하게 보였다. 소년은 정면에 멀리 보이는 익숙한 실루엣을 필사적으로 응시했다.

주저 앉아 있는 1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소녀. 그녀는 보호받아야 할 것처럼 왜소하고 가녀렸다. 백지장처럼 하얀 단발 머리와 백옥 같은 피부는, 그녀의 피로서 지금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소녀는 허리춤까지 오는 길이의 검은 코트를 입고 검은색 일렉트릭 기타를 쥐고 있었는데, 그것은 특이하게도 수채화 느낌을 주는 자주색 양귀비가 그려져 있었다.

석양을 등지고 있는 그 모습에, 소년은 잠깐동안 신적 존재를 마주한 듯한 경외심을 느꼈다.

 

 

그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불쾌한 느낌이 다시 솟구치더니 올리버의 입을 움직여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년이 아닌 눈 앞의 은발 소녀를 하는 말이었다.

 

“이모션 플레이어…
아직도 저항하는가? 추해서 눈뜨고 못 봐줄 지경이구나.”

“쿨럭… 큭…”

 

이모션 플레이어(Emotion Player). 소년은 분명 그 단어를 들어봤지만 어째서인지 무슨 뜻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그 단어를 처음 자신에게 말해줬던 사람에게는 실망감을 느꼈고, 두 번째로 말해줬던 사람에게는 온정을 느꼈다는 감정만이 남아있을 뿐.

 

“쯧… 그렇게도 이 소년이 포기하지 못하겠나?
이미 네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한 사람…”

“뭐…?”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올리버의 있는 그대로를 감싸준다면…
그도 빛으로 돌아올 수 있어…”

“하! 이해 못할 소리만 지껄이고 있군.”

“넌 이해 못해도 돼.
이건… 오직 올리버만을 위한 연주니까…
난… 포기하지 않아.”

 

은발 소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소년을 지배하는 정체불명의 존재를 꿰뚫어보려는 듯 올리버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푸른 바다처럼 청명하게 빛나는 눈. 소년은 분명 그 눈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그것에 애정을 느꼈고 구원을 바랬다. 모진 고초를 겪었을 텐데 그녀의 눈은 여전히 온화하게 소년을 감싸 안으려 하고 있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무엇이라도 될 것 같으냐?
소녀여, 지금 자신이 마탄의 사수 크루의 일원이라도 된 것 마냥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평범한 이모션 플레이어가 동료들의 도움도 없이 혼자 뭘 할 수 있다는 것이냐?”

 

마탄의 사수 크루라는 단어를 듣자 소년의 머리에 주마등처럼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싸늘한 시선과 서슬 퍼런 동정… 그것은 분명 아까 되살아난 기억에서 봤던 것이었다. 분명 소년은 그때 그 단어를 들어봤다. 그리고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기대만큼 커다란 분노와 실망감이었다.

 

“혼자가 아니야…”

“주변을 보아라!
너를 도와줄 자는 그 누구도 없다!
마탄의 사수는 진작에 너희를 포기했으며 네 오퍼레이터도 스나이퍼도 없도다!
지금 넌!
명백히 혼자다… 가녀린 소녀여.”

“아니, 난 혼자가 아니야!”

 

은발 소녀가 기타로 몸을 지탱하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리고 그녀는 소년의 눈을 간절한 눈빛으로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올리버… 거기에 있지?”

‘넌… 도대체 누구야? 어째서 나를 그렇게 구하려고 하는 거야?’

“이모션 몬스터의 거짓에 휘둘리지 말고 떠올려 봐…”

‘떠올리다니 무엇을?’

“올리버, 네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잖아.”

‘내가 원하는 것? 아니야, 난 원하는 게 없어. 난… 공허해.’

“부탁이야, 다른 누구의 말도 듣지 말고 네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내 자신의 목소리… 나 자신… 나…’

“올리버… 네가 원하는 게 정말 죽는 거야?!
네가 원했던 게 있잖아! 올리버!”

‘나, 난… 난…’

“소용없는 짓이다! 이미 이 꼬마는 내 것이야!”

“올리버!!”

‘난… 난…’

 

“죽고 싶지 않아…”

 

이모션 몬스터(Emotion Monster)라고 불린 존재의 목소리가 아닌 진짜 올리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죽고 싶지 않다.

 

“내게 살아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어…
내게 기대를 거는 사람도, 나를 봐주는 사람도 없어…
그래도… 그래도 난… 난 죽고 싶지 않아!
노엘!!”

 

그렇게 외친 순간. 소년은 마음 속 깊이 끓어오르는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꼈다. 그것은 부추겨진 자기자신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욕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소년이 노엘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진심을 외친 순간.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의 마음에 자리잡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크아악! 이… 끝까지 방해하는 구나! 이모션 플레이어!!”

“그것이면 충분해, 올리버. 이제 준비는 모두 끝났어.”

 

이렇게 말한 은발의 소녀 노엘은 그녀의 일렉트릭 기타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연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주변에 포근한 황금빛의 앰프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뿜는 빛은 마치 겨울날에 안녕을 고하는 봄의 햇빛처럼 따스했다.

 

“큭, 실성했구나! 크루도 없이 홀로 연주할 셈인가!
그전에 네 년을 죽여주마!!”

 

이모션 몬스터가 올리버의 몸을 움직여 소녀에게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디리링…

 

소녀가 부드럽게 기타 줄을 치자 상냥한 음색이 잔잔한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그 음색은 올리버의 마음 깊숙이 상처를 어루만졌다.

 

“크윽!”

 

음색의 파동은 소년의 말라붙은 마음에 붙은 더러운 떼를 부드럽게 털어내듯, 이모션 몬스터를 소년에게서 털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맹렬히 달려오던 소년의 몸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올리버… 너를 위해 연주할 게.
블레이드 코드(Blade Code)”

 

 

※ Ilust from Punishing gray raven

※ inspired by 泥中に咲く(HarryP, ウォルピス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