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개연성과 필연 개연성
게임 개발 현장에서 설정, 시나리오 관련 기획자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발견됩니다. 그것은 어떤 사건을 하나 구성할 때, 개연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양쪽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결국 이게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취향 차이, 방향의 차이라고 느낍니다. 이번 글에서는 개연성과 관련된 이 두 가지 관점, 우연 개연성과 필연 개연성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우연 개연성
우연 개연성은 말 그대로 거의 모든 사건의 개연성이 우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사건의 발생 이유에 특별히 이유가 없고 굳이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대부분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면 밥을 먹으러 갔는데 우연히 여자친구를 만났다거나, 우연히 선택한 여행지가 나의 과거와 연관된 장소였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제 개인 경험상 우연 개연성은 대중적 작품에서 쉽게 발견되는 듯합니다. 예를 들면 TV 드라마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의 대부분이 정말 우연찮게 그 장소에 하필이면 그 사람이 나타나는 식으로 많이 전개됩니다.
우연 개연성은 주로 우연으로 이루어졌다는 측면에서 너무 억지스럽다거나 말도 안 된다는 평가를 듣기도 합니다만,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현실감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거의 모든 일은 전적으로 우연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절제하지 않고 너무 남발하면 사건이 너무 중구난방해보이는 문제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연 개연성은 딱히 사건에 대해서 보는 사람에게 사전에 정보를 학습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대부분 1차원적으로 눈에 바로 보이는 정보에 집중되어 있으며 시간은 현재와 미래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콘텐츠를 소비하는 호흡도 짧은 듯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더 정보를 파고 들만한 것도 없습니다.
필연 개연성
반면에 필연 개연성은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느껴지며 논리적으로도 납득감 있게 설명됩니다. 사소한 일이라도 우연으로 벌어지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앞선 우연 개연성의 사례를 빗대어 보면, 여자친구가 그곳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하여 밥을 먹으러 갔다거나, 누군가 나의 과거를 알고 나의 과거와 연관된 여행지를 선택했다는 식입니다. 제 생각에 필연 개연성은 매니아층을 양산하는 픽션에서 많이 보이는 듯합니다. 장편 만화 혹은 소설이라거나, 애니메이션, 게임들인데,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오타쿠를 양산하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심리적으로 사건에서 서사성을 발견하려는 경향이 있고 빈 구멍이 있으면 어떻게든 메꿔서 안정된 상태를 찾으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 짜여진 필연 개연성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렬한 쾌감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개연성이 어색하게 느껴지면 오히려 작위적으로 보이기 쉬워서 우연 개연성을 채택하느니만 못한 상태가 되기도 합니다. 사전에 수많은 복선을 깔아두고 치밀하게 배경을 설정한 다음에, 그것들의 인과관계를 모두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한 점에 귀결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작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뒤에 감춰진 서사, 설정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기억하느냐에 따라 납득감이나 쾌감이 달라지기 때문에, 학습해야 하는 정보가 매우 많습니다. 시간은 현재와 미래 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소비 호흡도 매우 길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연 개연성과 달리 끊임없이 파고들어서 사건을 파헤치는 맛이 있습니다.
※ 신난 오타쿠는 여기서 발생한다. 흔히 오타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오타쿠가 위대해지는 포인트라거나, 오타쿠는 신나서 설명한다는 식의 말이 많은데, 이것이 바로 필연 개연성을 의미하는 지점이라고 생각됩니다. 오타쿠는 서사 뒤에 감춰진 깊은 뒷 이야기에 더욱 끌리고, 그것이 얼마나 기가 막히게 개연성 있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연 개연성을 주로 소비하는 사람들은 깊은 뒷 이야기는 관심 없거나 어려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오타쿠, 매니아 소비자들이 그런 장황한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신기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
타겟층이 누구냐가 중요하다
여기까지 보면 앞서 제가 방향의 차이라고 했던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즉, 우연 개연성과 필연 개연성 둘 다 장단점이 명확하기 때문에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하기 참 모호합니다. 평소에 우연 개연성에 맞춰진 작품을 소비했던 사람에게 필연 개연성을 들이밀면 너무 학습할 게 많고 소비 호흡이 길어서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갈 것이며, 반대로 필연 개연성을 주로 소비하는 사람에게 우연 개연성을 들이밀면 깊이가 없다며 외면할 것입니다.
특히 다수의 인원으로 콘텐츠를 개발하면 수많은 사람이 의견을 주기 마련입니다. 개발자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소비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심지어 스토리 영역은 일관성 없는 무수한 의견이 쏟아지는 곳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외부 의견에 너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개발하는 콘텐츠의 타겟층이 우연 개연성을 소비하는 사람들인지, 필연 개연성을 소비하는 사람들인지를 고려하여 그 수준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